소녀들 당찬 사회 주역으로 키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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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째 가업으로 공생원을 운영중인 윤록 원장. 한일간 민족차별 체험으로 더욱 더 여성문제에 진지하다.

김수용 감독의 <사랑의 묵시록>에 나오는 조선청년 윤치호. ‘목포의 거지대장’ 이란 별명은 지역의 고아들을 모아 1928년 공생원을 설립한 데서 유래했다. 전도사이기도 한 그의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랑과 열정은 한 일본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목포주둔 일본군의 딸로 정명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그녀는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 청년과 결혼, 이후 4천여명에 가까운 고아들의 부모가 된다. 그러나 남편이 6.25 전쟁중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자 일본여성이라는 색안경 낀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뜻을 계속 이어갔다. 앞의 영화는 바로 현 공생원 원장 전내록(29, 일명 윤록, 일본명 다우치 미도리)의 할머니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시즈코, 68년 작고) 여사의 일대기를 그려낸 것이다. 윤록 원장은 아버지, 고모와 고모부에 이어 공생원을 운영하며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120여명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미혼의 이 여성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비록 20대지만 당찬 확신으로 조용히 자신의 뜻을 실현해 가는 모습에서 미더운 지역 여성지도자의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올 9월 7일 제1회 ‘사회복지의 날’에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아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한일간 ‘박쥐신세’ 민족차별서 여성의식 생겨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왔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급우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죠.”

일본 언론에 소개되는 북한의 어린이들 흉내를 내며, “너한테서 김치냄새 나” “너희 나라는 못살지?” “너희는 이렇게 말하더라?”하는 식의 조롱섞인 장난들 속에서 어린 윤록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런 일방적 편견은 이후 민족차별과 여성차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저를 심하게 놀렸던 친구들 중엔 재일교포들이 많았어요. 김, 이, 박 등의 성을 고스란히 쓰면서 같은 한국인을 조롱하더라구요.”

자신을 왕따시키는 부류 중에서도 주동자급에 해당하는 친구들은 오히려 재일교포였던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 대해 더 무지하면서도 알려 들지도 않고 자신의 뿌리가 되는 나라에서 살다온 급우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며 놀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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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생원 아이들과의 즐거운 한때. 윤록 원장은 “여자라서 못할 것은 없다”는 신념으로 기회의 평등을 늘 강조한다.

목포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기까지 그는 공생원 원생들과 함께 자랐다. 부모님은 그를 원생들과 아무런 차별없이 대했기에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은 그를 일본사람이라고 놀려댔고 그래서 그의 마음의 상처와 부적응증은 한층 더 깊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놀림을 받는 박쥐신세였던 것이다.

10세에 도일, 중학교를 마치고 영국 캠브리지의 서포크 고교에 진학하게 된 것이 현재 자신이 균형잡힌 자아를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윤록 원장은 생각한다.

제1 원칙은 ‘소녀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몸에 밴 친절함, 정신적인 풍요로움, 마치 온국민이 사회복지사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영국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그들의 국민성에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을 실천하고 하루 세끼의 식사량을 금전으로 환산해 그것을 일년동안 꼬박 저축하더군요. 그렇게 모인 돈을 연말에 세계아동기구나 난민기구 등에 보내더라구요.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말이죠.”

여성문제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을까.

“재일교포 아이들에겐 자신도 모르는 피해의식이 있더라구요. 자기가 잘못해서 선생님께 혼나고선 그 이유를 자신이 재일교포이기 때문에 혼났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요. 우리 여성문제도 마찬가지에요.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우리 여성들이 가진 문제점을 먼저 정확히 파악하고 실제적인 차별과 우리의 부족함을 구분할 줄 알고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온건한 여성주의적 견해에 비해 그의 원생 교육방침, 특히 여자 원생들에 대한 교육관과 태도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공생원에 원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 중의 하나가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수선화 합창단을 혼성으로 재편성하는 일이었어요. 저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줘요. 반대로,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해서 여자들이 해내지 못할 일은 없어요. 중요한 것은 공평한 기회의 제공이라고 봅니다.”

50여명의 딸들이 내 큰 희망

그의 이런 평등의식은 성차별적 관행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일본 사회에서 의 불유쾌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일본의 여성들은 외국계 회사에 입사하기를 희망해요. 일본 기업보다는 남녀 차별이 적기 때문입니다. 일본 기업이 여성인력을 채용함에 있어 기대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남자 사원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것, 또 하나는 남자 직원들의 좋은 배필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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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록 원장의 활동은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타계한 오부치 전 총리는 98년 9월 김종필 총리 방일시 윤록 원장을 초청했다. (좌측부터)김종필 전 총리, (한 사람 건너)오부치 전 총리, 윤록 원장.

이삼십대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남편이 1년 동안 출산휴가를 내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성이 1년 동안의 출산휴가 후 회사로 돌아가면 자신의 설 자리를 잃게 되는 반면 남성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불이익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부간의 합의가 이루어져 남편들이 아이를 양육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아직도 가부장적 잔재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기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씩씩한 여성이 되게끔 지도한다는 윤 원장의 눈빛에는 강한 신념이 넘쳐 보인다.

“저희 교육 프로그램 중에 합기도 교습이 있어요. 남자 아이들과 함께 여자 아이들도 열심히 합기도를 배워요.”

“제겐 50여명의 딸과 동생들이 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자라고 해서 남자와 다를 것은 전혀 없다고 얘기해 줍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기회들이 다가올 때 평소의 노력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못해낼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느끼게끔 해주고 싶어요.”

이처럼 똑같은 기회의 제공이 공생원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하나씩 실천되고 있다. 이 기회를 향유한 소녀들이, 또 소년들이 더 큰 사회로 진출하여 각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가진 온갖 불평등의 냄새들이 조금이라도 가시지 않을까? 소녀 같은 윤록 원장의 맑은 웃음 속에서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믿음이 선명해진다.

목포지사=김종수 통신원 dotchy2001@yachoo.co.kr

윤록 원장 약력 1972년 전남 목포 출생. 일본 숙덕대학 사회복지학부, 동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 졸업,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사회복지학 석사학위 취득. 91년부터 해외아동 마음의 가족 사무소, 재일한국인 노인 홈을 만드는 회 등 일본의 사회복지단체 근무. 96년 은평천사원서 자원봉사, 같은 해 목포 공생원에서 활동 시작. 98년 공생원 원장 취임. 2000년 9월 제1회 사회복지의 날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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