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를 강요하는 사회

재작년에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가 표절 논란이 있었던 <본명선언>이라는 영화가 있다. 표절 시비를 떠나서 그 영화를 보고 난 많은 걸 느꼈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재일한국교포가 많이 사는 일본 어느 도시(아마도 오사카인걸로 기억된다)의 한 고등학교엔 해마다 한번씩 전교생 앞에서 '본명선언'이란 걸 하는 학생들이 있다. 재일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어본 적도 더더구나 가까이에서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나로선 '본명 선언'이란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상당수의 재일교포 2,3세의 자녀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면서 자기 본래의 성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재일교포라는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가시적·비가시적인 차별을 겪게 되고, 따라서 세상살이가 고달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내가 재일교포이건 일본인이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일본땅에서 살아가는데 구태여 내가 재일교포인 걸 밝혀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해 왔던 어떤 학생이 고1의 나이에 이르러 '본명선언'을 한다. 이제부터는 일본인 이름이 아닌 한국인 이름 아무개로서 살아가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본명선언을 하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복 받쳐 오르듯 솟구쳐 내린다. 실제로 본명선언을 했다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다시 일본인 이름으로 바꾼 사람도 더러 있다는데....그 장면을 보면서 난 '구태여 왜 그런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나? 그냥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살아가든지, 아니면 구태여 부모 혹은 조부모가 조선인(또는 한국인)이었음을 밝히지 않고 살아가는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최근 홍석천이라는 연예인이 동성애자로서 커밍 아웃을 했다. 그의 커밍 아웃을 두고 동성애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은 '뭐가 잘났다고 세상 만천하에 동성애자인 걸 알리느냐?'고 했고, 동성애에 대해서 그다지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그냥 조용히 편하게 살지 왜 구태여 커밍 아웃을 해야 했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재일 교포 2-3세들의 '본명선언'과 동성애자의 '커밍 아웃', 사뭇 달라 보이는 이 선언의 동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 같다.

<본명 선언>에서 한 재일 교포 인권 활동가가 이런 말을 했다. 본명선언을 일종의 자기 긍정을 위한 '카드'라는 것이다. 내가 재일 한국인으로서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재일 한국인에게 떨어지는 온갖 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발생해도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한 말콤 엑스가 생각났다. 흑인의 인권 운동은 흑인들 스스로 자신에 대한 긍정적 정체감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는 통찰력이 바로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캣치 프레이즈가 아니었던가?

홍석천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커밍 아웃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했다. '나는 투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고....그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었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개인적으로 게이로 살아가는 것과 커밍 아웃하는 건 많은 차이가 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이 알려지면서 자신을 홍석천이라는 한 인간이 아니라 '호모'라는 렌즈를 끼고 바라보는 시선들, '호모새끼'라는 폭력적인 말들, 그리고 홍석천처럼 TV 출연 금지와 같은 경제적 불이익들 등,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내가 아는 한 게이도 한 신문사에 인터뷰한 것이 알려져 가족으로부터 의절을 당했고, 직장에서는 해고를 당했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커밍 아웃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씁쓸하게 말한 적이 있다.

홍석천의 경우에서 처럼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는 것, 나다운 삶을 찾는 것, 아니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 지는 것에도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개인의 커밍 아웃은 정치적인 것이며, 따라서 많은 것을 숙고한 끝에 내려야 하는 결단인 것이다. 그러나, 그저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삶을 살기 위해, 그저 자신의 소신대로, 자기가 뜻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새삼 끔직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커밍 아웃은 게이로서, 아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몸짓은 아닐런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성실하고 진실한 이 사람에게서 나는 어떤 존경심이 느껴진다. 누가 뭐라고 하건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 하려 하지 않았던 그 용기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주고 싶다.

권수현/여성학 강사. speculum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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