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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13년 전 기자가 겪은 학교폭력, 세월 지나도 참혹한 현실 여전 이방인·학교폭력 피해자·장애인 등 소수자가 ‘타겟’ 되고 피해 사실 알려도 학교는 수수방관… 가해자 ‘인과응보’ 없어 현실은 문동은 아닌 박연진 편…피해자 1/3 “문제 해결 안 돼”

학폭 고발 “‘더 글로리’는 없다”… 현실은 박연진 편

2023. 03. 13 by 박상혁 기자
더 글로리 속 장면 ⓒ더 글로리, 넷플릭스
학교폭력 문제를 전면에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담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2부가 1부에 이어 폭발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폭력에 영혼까지 붕괴된 문동은(송혜교 분)이 온 생을 걸어 준비한 복수를 펼치는 이야기에 국내는 물론 세계가 열광하고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드라마 속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의 피해자들은 드라마처럼 통쾌한 복수를 하지 못한 채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13년 전, 중학교 1학년이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담임선생님은 반장에게 학교폭력 실태조사 설문지를 반에 돌린 뒤 작성이 끝나면 모아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반장은 내게 설문지를 나눠주며 싱긋 웃었다. ‘학교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체크하고 그대로 펜을 내려놨다.

10분쯤 지나자 반장은 책상에 놓인 설문지들을 하나씩 수거해갔다. 반장은 내 설문지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다시 싱긋 웃었다. 복도에서 무릎 꿇으라 소리 지르며 1년 내내 나를 괴롭히던 반장은 그렇게 무해한 사람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방인·학교폭력 피해자·장애 학생…소수자는 괴롭혀도 돼

초등학교 6학년, 학군이 좋다며 이사 간 동네에서 ‘지옥’이 시작됐다. 낯선 아이들과 친해지려 부단히 노력하던 학기 초,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세던 반장은 사소한 빌미를 잡더니 학교 뒤편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나를 데려갔다. 반 학생 전체가 구경 온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은 다음 날부터 ‘왕따’로 낙인찍혔다. 때려도 되고, 훔쳐도 되고, 욕해도 아무 일 없던 1년은 참 길고 긴 시간이었다.

초등학생 때 겪은 학교폭력 피해는 초등학교를 벗어난 다른 공간에서도 가해 학생의 괴롭힘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너 초등학교 때 왕따였다며?”로 다시 시작된 괴롭힘은 학교와 학원 모두에서 이어졌다. 폭력이 용인된 단체에서 피해자 홀로 저항할 수단은 없다. 이사를 한 번 더 가고 고등학교에 입학해 내가 왕따였음을 아무도 모를 때에야 4년에 걸친 따돌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겨우 벗어난 왕따의 자리엔 비장애인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발달 장애 학생들이 남겨져 있었다. 가해 학생들은 장애 학생이 저항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행동을 조롱하거나 물건을 훔쳤고, 장애 학생이 소리를 지를 땐 시끄럽다며 책으로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반년에 걸친 학대에 장애 학생이 등교 거부를 표현하자 학교폭력심의위원회가 열렸다. 가해 학생들을 말리지 못했던 목격자들이 입을 열고 나서야 비로소 장애 학생을 향한 괴롭힘이 사라졌다.

더 글로리 ⓒ더 글로리, 넷플릭스
 ⓒ더 글로리, 넷플릭스

피해 사실 알려도 수수방관…멀쩡히 어른 된 가해 학생들

‘더 글로리’에서 현실과 가장 흡사한 점을 꼽으라면 단연코 ‘방관자 어른들의 잔인함’이다. 정년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은 가해 학생이 내 뺨을 때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피해 경험을 들은 체만 하던 엄마는 어느 날 “네가 그러니까 따돌림이나 당하지”라고 조롱했다. 시립 청소년상담소의 상담소장은 한 달에 걸쳐 심리 상담을 진행하다 “너 자살 안 할 것 같아. 공부는 잘하니?”라며 당신 자식 성적을 자랑했다. 피해자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철저히 외롭게 혼자 감당해야 했다.

어른들은 피해자의 회복보다는 가해 학생의 대학 진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 1학년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피해 학생이 전학과 동시에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가해 학생들의 학생기록부에 가해 사실이 적히는 상황을 막지 못하자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2년에 걸쳐 가해 학생들에게 은밀히 학생기록부 컨설팅을 진행했다. 덕분일까, 내 주변 수많은 가해 학생 중에 학교 폭력 기록 때문에, 대학에 못 갔다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어른들의 무관심과 조력 사이에서 가해 학생들은 탈 없이 대학에 입학했다. 학원에서 항상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던 학생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며 체육교육과에 진학했다. 말하는 모양새가 맘에 안 든다며 내 뺨을 후려갈긴 학생은 국내 최고로 꼽히는 과학대학에서 인권동아리의 장을 맡았다. 복도에서 무릎을 꿇으라던 반장은 “그땐 철이 없었다”고 웃으며 중학교 시절을 회상했다.

현실은 문동은 아닌 박연진 편…피해자 1/3 문제 해결 안 돼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복수귀가 된 문동은은 끝내 복수에 성공했다. 반면, 나를 포함한 현실의 수많은 동은이들은 복수는커녕 피해 상황에서 벗어나기조차 버겁다.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사건'에서 볼 수 있듯, 가해자들은 가해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사건을 축소하고 처음부터 주어진 탄탄대로로 마저 뛰어가려 애쓰며, 법은 대부분 그들의 편에 서 있다.

학교폭력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2004년의 문동은, 2009년의 나, 2017년의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피해자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린 3건 중 1건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피해자 10명 중 1명은 더 괴롭힘을 당하거나(14%)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17.3%) 주위에 알리지 않고 혼자 속앓이만 했다.

신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가 자녀의 과거 학교 폭력 문제로 낙마한 가운데 28일 오후 정 변호사 아들이 진학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대학교에 관련 내용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자녀의 학교 폭력 문제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사태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지난달 28일 서울대학교에 붙어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어른이 된 피해자들은 그때의 일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며 지금도 고통스러워한다. 박애리 순천대학교 교수와 김유나 유한대학교 교수 연구팀의 ‘아동기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초기 성인기 심리 정서적 어려움 및 자살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어릴 적 학교 폭력 피해를 겪은 대학생 절반 이상이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고, 실제로 시도할 가능성이 피해를 겪지 않은 이들보다 2.6배 크다. 또한 뚜렷한 원인 없이 심리적인 이유로 통증이나 어지러움 등이 생기는 신체화 증상을 더 많이 호소했다.

‘더 글로리’를 연출한 PD마저 학창 시절 가해했다는 사실이 폭로될 정도로 학교 폭력이 만연한 현실이다. 13살의 내게 지옥을 안겨준 반장의 이름 세 글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야 사회적 체면을 깎아 복수할 수 있다지만, 대다수의 박연진은 공인도 아니고 증거도 남지 않아 뒤늦게라도 복수할 방법이 없다. 학교폭력 가해자 처벌이 학교 밖이 아닌 학교 안에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문동은이 마침내 모든 가해자에 복수에 성공했고 사람들은 이에 열광했다. 그러나 모든 학교폭력 피해자가 문동은처럼 자기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다. 더 글로리가 화제가 되고, 아들의 학교폭력 전력으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사태가 드러나며 각계각층에서 학교폭력이 얘기되는 지금만큼 학교폭력 피해자 구제 제도를 개선할 적기는 없다. 오늘도 불가능한 복수를 다짐하는 수많은 동은이에게 주여정, 강현남과 같은 든든한 지지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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