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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우리말 쓰기] ⑧ 실종된 여름

2022. 07. 14 by 곽민정 방송사 보도본부 어문위원
금나래 물첨벙 쉼터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사진=금천구청 제공
금나래 물첨벙 쉼터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사진=금천구청 제공

지난 한 주 국내외적으로 무거운 기사가 많았습니다. 고물가와 에너지난, 기후위기와 재난, 전쟁과 식량난 등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한 정치인의 충격적인 죽음까지 뉴스를 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사들 틈에서 사진기사 하나가 눈길을 끌었는데요,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의무 없이 개장한 해수욕장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기자는 “3년 만에 완벽한 형태로 해수욕장이 개장했다”며 코로나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썼더군요. 기사엔 푸른 바다가 빛나는 속초의 한 해수욕장 사진이 실렸는데요, 마스크를 벗은 피서객들이 거리두기 없이 오밀조밀 모여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어찌나 낯설어 보이던지요. 3년 만의 풍경이라 무척 생경했습니다.

‘여름’은 어디 가고 ‘썸머’만

내친김에 올여름 전국에서 펼쳐지는 물놀이와 행사 등을 찾아보았습니다. 거리두기와 마스크에서 해방되어선지 그간 중단됐던 행사들이 전국에서 재개되더군요. 강릉에선 맥주축제와 록 페스티벌이, 동해에선 ‘코리아 힙합 어벤져스’가 열리고, 속초와 고성에선 각각 ‘썸머 페스티벌’과 ‘삼포 미드나잇 썸머 뮤직 페스티벌’ 등이 개최된다고 합니다. 놀이공원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울랜드는 여름 대표 행사인 ‘썸머 워터워즈’를 재개하고, 에버랜드는 ‘썸머워터펀’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한강에서 펼쳐지는 축제도 빼놓을 수 없지요. 해마다 ‘한강몽땅’으로 여름에만 열리던 축제가 올해부터는 사계절로 확대돼 ‘한강 페스티벌’로 열리는데요, 강바람을 맞으며 야외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한강무비나잇’과 클래식·퓨전국악·라틴음악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즐길 수 있는 ‘한강썸머뮤직피크닉’ 등 프로그램이 준비된다고 합니다.

썸머, 섬머, 서머

전국의 행사들을 찾아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독자분들도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행사명에 쓰인 ‘썸머’ 때문입니다. 전국 어디랄 것 없이 한결같이 행사명에 ‘썸머’를 포함해 영어를 뒤죽박죽 쓰고 있습니다. 대체 여름은 어디 가고 썸머만 보이는 걸까요? 사실 영어 summer를 제대로 표기한 곳도 없습니다. 올바른 표기는 썸머도 섬머도 아닙니다. 발음기호 [ˈsʌmə(r)]를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서머’가 맞습니다. 현실음과 너무 거리가 먼 것 아니냐 하는 논란은 여기선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영어를 쓰지 않으면 굳이 논란이 될 이유도 없지요. 불필요한 사용에 틀린 표기법까지, 여름을 버리고 썸머를 쓰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썸머가 예상보다 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자니 정부 부처와 서울시 등 다른 공적 기관들의 사정도 궁금해졌습니다. 몇 곳의 홈페이지를 둘러보았는데요, 7월 13일 기준 서울시는 뉴스와 전자책 등에서 썸머가 405건 검색되더군요. 경기도는 79건, 문화체육관광부는 91건이 각각 검색되었습니다. 단순 검색 차원이고, 대부분 행사와 관련된 내용이어서 자체 생산한 글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자의든 타의든 국민에게 ‘썸머’를 노출하는 데 한몫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더러는 올바른 표기인 ‘서머’가 검색되기도 하지만 굳이 영어를 써야 할까요? 어떠한 이유라도 ‘여름’ 대신 영어 summer를 사용하는 데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행사명과 공공언어에서 썸머를 지우기 위한 논의가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그간 사용해온 표현과 행사명을 고친다는 건 수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실종된 여름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담입니다만, 검색 과정에서 알게 된 서울 금천구의 물놀이장 이름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물첨벙 쉼터'라 하더군요. 그 흔한 썸머와 워터를 사용 않고 ‘물첨벙’을 사용해 이름을 지은 분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곽민정 방송사 보도본부 어문위원<br>
곽민정 방송사 보도본부 어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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