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살아남은 여성들

필리버스터 발언 그대로 담은

『거리에 선 페미니즘』

 

‘포스트 메갈’ 시대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짚은

『여성혐오 그 후』

서울 강남역에서 벌어진 5·17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살해)가 우리 사회에 남긴 충격은 컸다.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의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점화된데 이어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성폭력 고발 운동이 시작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후 촛불 정국에서도 일부 여성혐오가 드러나자 “조개가 곧 해일”이라며 여성들이 분명한 목소리를 낸 것도 특기할만한 현상이다.

올해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가부장제를 뚫고 나오면서 여성혐오 극복과 페미니즘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연말을 앞둔 출판계에서도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페미니즘 서적 출간이 이어지고 있다.

5·17 페미사이드가 일어난 지난 봄, 한국여성민우회가 서울 신촌 거리 한복판에서 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나는 ○○○에 있었습니다’를 기록한 『거리에 선 페미니즘』(궁리)이 우선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여성혐오를 멈추기 위한 8시간28800초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대독을 포함해서 40여 명의 자유발언자들이 성추행, 성폭력 경험부터 외모로 인한 압박과 옷차림에 대한 검열, 대중교통에서 겪는 문제, 여전히 가족 내에서 존재하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 등을 힘겹게 고백한다.

필리버스터 참여자 중 반은 우연히 지나던 행인이었고, 나머지 반은 미리 발언을 신청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직군은 프리랜서, 회사원, 정치인, 학자, 연예인 등으로 다양했다. 발언자 중에는 남성도 있었다. 여자라서 폭행을 당하고, 여자라서 강간을 당하고…. 여자들은 밤늦게 헤어지면서 “조심해서 들어가라. 도착하면 연락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어디 그러는 법이 있던가? 마흔두 개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가부장제와 여성폭력의 실상에 눈뜨게 되고, 우연히 살아남은 우리가 어떻게 연대해 사회를 바꿀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여성들이 성폭력의 생존자일 뿐 아니라 성정치를 주도해갈 직접행동주의자로 거리에 서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 온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여성들은 여성의 일상적 삶에 침투돼 있던 두려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그 두려움이 오직 여성에게만 해당된다는 깨달음에 대해 증언했다”며 “성차별이 어디 있냐는 무지한 질문 앞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증언들이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성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이현재가 쓴 『여성혐오 그 후』(들녘)는 여성혐오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포스트 메갈’ 시대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짚어주는 책이다. 저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인정 이론과 페미니즘을 접목시킨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 교수로 있다.

저자는 우선 온라인 안팎에서 다양한 여성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페미니즘의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성시대, 메갈리아, 워마드 등 여초 카페들이 온라인에서 보여준 강력한 감정적 결속과 오프라인에서 발휘한 뛰어난 정치력 덕에 여성억압, 성적 대상화, 성폭력 등 여성혐오와 직결된 위계적 젠더 관계를 문제삼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부상한 페미니즘 주체들을 ‘비체’로 호명한다. 비체(abject)가 대상(object)이 ‘아닌(a-)’ 이유는 모든 규정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새롭게 부상한 여성들은 전통적 젠더 역할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착한 타자가 아니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다. 경계를 지키려는 남성들에게 이 여성들은 그야말로 ‘잡년’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연대가 가능하려면 각각의 페미니즘이 모두 비체들의 행위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적어도 페미니즘이 여성 비체들의 실천에 빚지고 있음에 동의할 때 소란스러운 연대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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