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되살리자 외치면서도

청와대 ‘여성 사생활’ 운운하고

진보세력도 공공연히 ‘아줌마’

집회장선 성폭력 사건까지

 

성평등한 새 시대 열려면

‘여혐’부터 뿌리 뽑아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비판에는 유독 생물학적 성을 부각시키고 원색적인 여성혐오적 비판이 많다. ⓒ트위터리안 하은(@_xiayin)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비판에는 유독 생물학적 성을 부각시키고 원색적인 여성혐오적 비판이 많다. ⓒ트위터리안 하은(@_xiayin)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사상 초유의 사태이자 뿌리깊은 ‘여성혐오’(이하 여혐)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다. 100만 촛불이 광장에 모여 무너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새 시대를 열자고 외치는 집회현장에서도 여혐이 판치고 있다. 유력 정치인과 유명 진보인사들도 여혐 발언을 쏟아냈고,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인조차 ‘여성 사생활’ 운운하며 공개적으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상황이다.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실현을 외치면서도 뿌리깊은 여성혐오는 버리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양면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셈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새로운 시대는 성평등 가치를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지금의 여혐 프레임부터 깨야 한다는 요구가 뜨겁다.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을 대표성도 없는 사인과 공유한 박 대통령을 비롯해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전횡을 하며 ‘비선 실세’로 지칭된 최순실씨, 온갖 특혜를 받은 최씨의 딸 정유라씨까지 모두 여성이라는 이유로, 생물학적 여성을 부각시키는 비판이 늘 뒤따른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국가 시스템을 장악한 비선 실세를 ‘저잣거리 아녀자’라고 표현했고, 정동영 국민의당 의원은 “강남의 무속 여인”이라고 말해 성별에 초점을 맞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을 향한 비판 곳곳에 ‘여성혐오’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연일 이번 사태 관련 보도를 내놓는 언론도 여성혐오 확산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검찰에 출두한 최씨가 신었던 신발이 수십만원대의 명품 브랜드라는 사실이 주요 뉴스로 다뤄졌고, ‘강남 아줌마가 대통령 연설문을 뜯어고쳤다니’라는 기사 제목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실패가 곧 여성리더십의 실패라는 식의 칼럼은 개인의 문제를 여성 리더 전반의 문제로 치환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공론의 장에서도 여성혐오는 어김없이 드러났다. 지난 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차 촛불집회에선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가 대통령을 향해 ‘잡년’이라고 표현했다가 집회 참가자들의 항의에 사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주일 뒤 100만명의 인파가 모인 12일 3차 촛불집회에서는 일부 여성주의자를 중심으로 ‘여성혐오 없는 평등한 집회를 열자’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여전히 여성혐오 발언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됐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신한나(36·서울 은평구)씨는 “박근혜와 최순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암탉’ ‘강남 아줌마’ 등 여성비하 발언을 하거나 여성혐오 이슈를 생산하는 것은 잘못 됐다”면서 “이러한 기존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긍정적인 부분은 지금까지는 ‘대의’를 위해 차별 발언을 듣고도 참아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차별 발언 하지 말라”며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집회를 주최하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도 11일 최근 촛불집회에서 사회자와 일부 발언자들이 여성혐오·장애인 차별 발언을 한 일에 대해 사과했다.

주최 측은 “저들을 향한 우리의 분노를 여성과 장애인을 차별하는 언어로 표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저들이 저지른 큰 죄와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폐단을 개인의 문제로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며 “지금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국민 중 다수가 여성이고, 장애인이며, 차별받는 이들이다. 우리는 성차별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저들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100만명이 모인 촛불집회 직후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의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는 증언들이 쏟아져 씁쓸함을 더했다. 실제로 한 50대 남성은 집회 현장에서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든 시민 중 다수가 여성들이다. 이들은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며 이번 사태에 대한 비판이 여성혐오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해일이 이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식의 반응으로 여성혐오를 작은 일로 치부하려는 반응은 정말 “뭣이 중한지” 모르는 이들의 한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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