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법 제정 10년 만에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의한

장애여성과 장애소녀의 인권증진’

국제컨퍼런스 열어

페미니스트 법학자 킴벌르 윌리엄 크랜쇼(1989)는 이주여성들과 백인여성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슈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연구 발표했다. 예를 들어 똑같이 가정폭력에 노출돼도 이주 여성들은 백인여성들과 달리 폭력 남편의 처벌을 원치 않으며, 가정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개입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를 다중적 억압이 교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후 여성이슈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단순 구도가 아닌 다양한 사회적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어왔다. 장애, 성적 지향, 인종, 계급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이뤄진 여성운동은 이성애 중산층 서구 여성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크랜쇼의 연구발표 이후 교차성에 관한 경험 연구가 쏟아졌고, 현재 교차성은 여성이슈와 인권이슈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개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 연구를 세계 인권에 반영시킨 최초의 국가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던 김미연 장애여성문화공동체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당시 장애인권리협약에는 젠더 이슈가 없었고, 여성이슈에는 장애인 이슈가 없었다”며 “그런데 2006년, 한국 여성장애인단체가 다중적 억압을 겪는 여성들의 이슈를 국제인권협약에 넣는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0월 18~19일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의한 장애여성과 장애 소녀의 인권증진’ 국제컨퍼런스가 진행됐다. 세계 각 국의 대표들이 한국에 모여 장애 여성·소녀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실질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김 대표는 “2001년 멕시코 대통령이 유엔에 장애인 이슈를 처음 제안했다. 그후 8차 회의를 거쳐 2006년 유엔에서 장애인권리협약이 채택됐다”며 “그런데 초안에는 장애아동에 관한 사항은 있었지만 장애여성들에 관한 어떤 조항도 없었다”고 말했다. 인권협약 제정 과정에서 여성차별과 장애차별의 교차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당시 초안을 보고 여성장애인으로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여성장애인은 강제 불임수술, 강제 낙태, 잦은 성폭력, 열악한 노동시장 등 남성과 달리 여러 가지 차별과 억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부터 이미 장애인 여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 차별 조항에 젠더관점을 넣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반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는 젠더 관점이 빠져 있었다. 여성 장애인 단체들은 우리 정부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나가서 다른 국가들을 설득했고, 김미연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장애인 대표들은 세계 장애여성단체들을 설득했다. 결국 국제장애인권리협약 6조에 ‘여성 장애’가 항목으로 채택됐다. 우리 정부와 시민단체의 협력으로 이뤄진 결과다.

국제법은 주로 외교관과 법률전문가들이 만드는데, 이 경우에는 당사자성이 강조된다. ‘nothing without us’ 가 중요한 원칙이며, “여성장애인들이 참여했다”고 국제협약이 만들어지면 국가들은 4년마다 보고서를 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각 나라의 장애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알려지고 개선되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진 것이다.

김 대표는 “다중적 억압을 받는 특정단체의 요구를 국제 법에 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며 “우리는 단지 우리들의 상황을 말했을 뿐인데 세계 인권이슈를 한 단계 높이는 기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해외에서 우리나라의 트레이드 마크가 장애여성 이슈와 정보통신기술(ICT)이 됐다”고 말했다.

교차성 이슈는 여성이슈와 인권이슈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지점이다. 현재 한국 장애여성들이 이뤘던 성과는 다른 다중적 억압에 놓인 여성들의 이슈에 인권적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이제 모든 인권문제는 교차성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장애 여성 중에서도 레즈비언, 탈북과정에서 정신장애가 된 여성들,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이주여성 문제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장애여성들의 이슈는 단지 그들만의 이슈가 아니라 다중적 억압을 겪는 많은 소수자들의 이슈로 발전·전환돼야 한다”며 “장애인차별조항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별조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장애 경험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 여성리더들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차별을 받곤 하지만 그 경험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걸 경험했다”며 “집중하고 직면하고 나아가면 엄청난 장점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소수자라고 기죽을 일은 아니다. 우리 안에 엄청난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깨워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장애인 딸들이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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