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프렌즈’

김혜자, 나문희가

반복해서 본 그 영화

 

‘델마와 루이스’

둘의 아름다운 탈주여행

 

페미니즘으로 읽은

해외 여성영화 5편

1970년대 영미를 중심으로 영화 비평이 제도화되고 페미니즘 비평이 본격화됐다. 주류영화와 안팎에서 ‘씨네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비평에서는 새로운 페미니즘 영화를 독려할 뿐 아니라 기존의 영화들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가받지 못했던 영화계의 여성 인력들에 주목했다.

이후 영어권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영화 역사에서도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 영화 만들기와 비평은 발전해 나갔다. 지역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방대한 이 ‘세계영화’라는 범주에서 페미니즘 캐릭터를 찾아내는데 중요한 문제는 그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리스트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이 리스트는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영화계 안팎에 가장 ‘핫’한 의제였던 90년대 초반과 2010년대에,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과 파급 효과를 남겼던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영어권 영화들로 채워진 리스트가 되었지만, 한국 관객에게 가시화되지 않았던 제3세계 영화들과 여성인물들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선정된 리스트도 가능하다는 것 역시 염두에 두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얼리언 4’의 리플리(왼쪽).
‘에얼리언 4’의 리플리(왼쪽).
   

리플리-에일리언 시리즈(1979~)

매드맥스의 퓨리오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라 코너와 더불어 영화계 대표 여전사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리플리였다. 리플리의 신체는 강인한 전사의 것이기도 하지만 임신과 출산의 장소이기도 하며, 모성에 대한 양가성은 ‘에일리언’의 주제로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격렬한 토론을 낳기도 했다.

 

‘델마와 루이스’의 델마(오른쪽)와 루이스.
‘델마와 루이스’의 델마(오른쪽)와 루이스.

루이스, 델마-델마와 루이스(1991)

여자친구 두 명이 우연히 기획한 주말 여행은 반여성적 사회에 저항하는 탈출 여행이 된다. 델마와 루이스는 평범한 여성들인데, 많은 평범한 여성이 그렇듯 가정폭력과 과거 성폭력(과 공권력의 반여성적 대우)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탈주와 우정은 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억압의 공고함에 좌절하면서도 희망을 꿈꾸고 싶은 마음은 마지막에 그 유명한 프리즈 프레임을 남겼다.

‘델마와 루이스’가 개봉된 지 올해 25주년을 맞았다. 최근 TV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희자(김혜자)가 정아(나문희)와 여행을 꿈꾸며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영화가 바로 ‘델마와 루이스’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

퓨리오사-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5)

퓨리오사가 강인한 여성의 가장 최신 레퍼런스다. 퓨리오사는 거대한 대의를 따르는 영웅도 아니다. 이상향은 있지만 그 이상은 영화 내에서 파괴된다. 퓨리오사에게는 고정된 정체성을 만드는 과거의 트라우마나 죄의식 역시 없다. 끊임없이 도로를 달리고, 우연적 연대에 헌신하며,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테레즈’의 캐롤
‘테레즈’의 캐롤

테레즈-캐롤(2015)

‘캐롤’의 의의는 여러 방면에서 논의될 수 있는데, 그 중 중요한 성취 중 하나는 시선(gaze)과 관련된 실험이다. 영화 속 성별적 시선에 대한 로라 멀비의 논의는 영화비평에 중요한 분기점을 가져왔고, 이후 시선의 문제는 언제나 권력의 문제와 결부된다. 이러한 논의는 남성적 시선과 욕망을 밝히는데 유효했다면 (관객과 카메라의 시선이 일치하는) 여성 인물의 시선은 어떨까. 남성적 권력을 뒤집은 여성 권력일까, 아니면 시각장에서 권력 관계를 해체하는 전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영화 ‘캐롤’은 후자의 문제를 파고든다. 이 점이 정확하게 보이는 테레즈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첫 시퀀스, 그리고 같은 사건을 캐롤의 시선으로 반복하는 마지막 시퀀스 뿐 아니라 영화 전체는 테레즈와 캐롤의 시선 그리고 그에 끼어드는 시선으로 세심하게 설계돼 있다. 이 관계에서 먼저 능동적으로 설계된 시선의 주인은 나이, 사회적 지위, 계급적 위치에서 통상적으로 약자라고 믿어지는 테레즈다. 영화를 세심하게 보기보다 남성적 관계에 익숙한 상투적 믿음으로 테레즈가 약자고 (자기 정체성이 없는 상태에서) 캐롤에게 말려 들어갔다고 믿는 남성 평론가들의 게으른 비평이 논란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고스트 바스터즈’의 패티(맨왼쪽).
‘고스트 바스터즈’의 패티(맨왼쪽).

패티-고스트 바스터즈(2016)

2016년에 리부트된 ‘고스트 바스터즈’는 적당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 여름용 블록버스터다. 주인공 4명이 모두 여성이지만 특별히 (성적으로든 페미니즘적 이슈로든) ‘여성화’되지 않고, 페미니즘 주제가 내세워지지도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남성 관객들에게 큰 문제가 됐다.

관객들이 재미없어 하거나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있어도 이렇게 남성 관객들이 단체로 열렬하게 미워하고 출연진과 제작진에게 사이버 테러를 가한 영화는 없다. (반복하지만)이 영화는 내용적으로 특별히 여성적 주제나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혐오가 영화 내용이나 완성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여성혐오라는 것을 증명한다.

여성은 주변적, 부분적이어야 하거나 전면에 내세워지려면 여성문제와 같은 어떤 ‘특수한’ 문제라도 대변해야 한다. 그냥 평범하게 당연히 택할 수 있는 캐스팅으로 유명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반발을 산다. 그 중 가장 열렬한 혐오가 쏟아진 캐릭터는 패티인데, 패티는 여성이며 더군다나 흑인이지만, 영화 내에서 그것은 특별한 기능을 하지 않는다. 즉 흑인 여성이라서 더 불쌍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특권적 지위를 갖지도 않는다. 영화 주인공이 당연히 될 수 있는 ‘평범한’ 패티가 주류 관객들의 무엇을 거슬리고 있는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주류가 취할 수 있는 관용의 위선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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