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무숙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민무숙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얼마 전 인상적인 강연회가 있었다. “조직에서 남성 상급자들의 인식을 어떻게 하면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라는 청중의 질문에 패널로 나온 외국계 증권사 대표의 답변은 간명했다.

“남성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화에 매우 취약해요. 남성들을 변화시키느라 노력과 시간을 쓰지 마시고, 여성들이 세상을 변화시키세요. 그것이 더 빠릅니다.” 여성이 아닌 남성 대표였기에 그의 직설적 표현에 모든 청중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지난 경험이 겹쳐져 웃으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기관장의 직분상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많은 남성 리더와 타 기관장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10명 중 8명으로부터 듣는 첫마디는 거의 공통적이다. “이제 우리 남성들 좀 봐주세요. 이러다가 우리가 설 자리도 없겠어요~”

반농담조의 말을 듣게 되면 성별 대립으로 치환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설명하는 일은 매우 치밀한 사고를 요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남성을 포섭하기 위한 시도는 시간 낭비라는 강연회 패널의 답변이 우리 사회에서는 꽤 적확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곤 한다.

이들의 눈에는 신입 직원의 상당수가 여성인 것만 크게 들어오고, 파이프라인이 새면서 여성 중간관리자 비율은 현저히 떨어지며, 나아가 100대 기업 중 여성 임원 비율이 2.3%에 불과하다는 점은 보이지 않는다(의도적으로 외면할는지도 모른다). 또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200만명이 넘으며, 이로 인해 손실되는 사회적 비용은 연간 15조원 가까이 된다는 점도 큰 관심 사안이 아니다.

반면 가까운 이웃이자 경쟁국인 중국의 경우 2013년 고위경영직에 오른 여성 비율이 51%를 기록했고, 예컨대 알리바바 이사회 이사의 3분의1이 여성이며, 부사장 이상 최고위직 임원의 4분의1이 여성이라는 점은 보지 못한다. 나아가 유럽연합(EU)가 기업의 비상임 이사(임원)의 40%를 여성으로 채우라고 권고하고 있고, 그래서 실제 많은 유럽 국가가 그 비율을 이행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M자 곡선을 지속적으로 보이면서 낮은 비율을 차지하는 일본과 한국의 장래 모습은 가히 비교 대상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최근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인식한 아베 정부는 다보스포럼에서 “일본은 여성이 빛을 발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베 정부는 2020년까지 일본 지도자의 30%까지 여성의 수를 늘리겠다고 약속한 후 각종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 우리 남성 지도자들이 가지는 여성 인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아직 절실하지 않아 저성장 탈출 속도가 더딜까 매우 우려스럽다.

한국 사회는 이미 남성은 빵을 벌고, 여성은 가사를 전담하는 전통적 성별 분업의 평형 상태로부터 비가역적인 탈출을 시작했다. 에스핑 앤더슨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이탈은 되돌릴 수 없을 뿐더러 한국사회처럼 계층화가 덜 되어 있고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성평등 가치는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확산돼 여성은 예전과는 다른 행동 양식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과 달리 많은 한국의 남성들은 아직도 이러한 불가역적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가 그립다며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있다. 남녀간 의식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성평등한 역할 조정의 단계로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초저출산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뿐더러 세계화 시대에서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국가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 이래도 한국의 미래는 여성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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