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트 입센 관장 “구술사 수집 온힘 쏟아”

박물관은 여성 지혜의 원천 ‘참여하는 박물관’ 구현

한국 국립여성사박물관 역할모델… 공동체 위한 플랫폼 기능도

 

덴마크 오르후스에 터를 잡은 여성박물관 전경.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열린 문화공간이다.
덴마크 오르후스에 터를 잡은 여성박물관 전경.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열린 문화공간이다.

<연재에 앞서>

여성박물관 건립을 위해 노력하는 세계 여성들의 경험과 지혜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기획한 것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도 2002년부터 여성사 연구확대와 여성운동의 소중한 결실의 하나로 여성가족부 산하에 여성사전시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된 건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제상으로도 그 위상이 불안정하고 수탁 기관에 따라 콘텐츠 내용도 달라질 수 있어 애시 당초 여러 문제를 안고 시작했다. 초기에 여성가족부 직영(2002∼2004년)으로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2층 한 곳에 전시관을 운영한 후 여성문화예술기획(2004∼2010년), 다음으로 디자인소조(2010∼2011)가 각각 수탁기관이 됐다.

2012년부터 수탁기관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으로 이전된 후에도 한동안 서울 대방동에서 머무르다 2014년 4월말 경기도 고양시 지방정부종합청사로 옮겨가 9월 1일 개막식과 함께 경기도에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다양한 콘텐츠와 방향성을 갖추며,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사회의 요구에 걸맞는 국립여성사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여성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자는 2013년 ‘고양시 여성사전시관 이전을 위한 콘텐츠 개발연구’에 책임자로 참여했으며, 2014년 여가부에서 지원하는 ‘여성사박물관건립 기본계획과 콘텐츠 개발연구에 관한 프로젝트’를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와 공동으로 책임을 맡아 수행하면서 세계적인 차원의 여성박물관과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했다.

필자는 2015년부터 2년 동안 세계의 여러 여성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우리에게 대안이 될 만한 곳에 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아시아, 유럽, 북남미, 오세아니아 등의 30여 개 여성박물관들을 탐방했으며, 내년 여름에 아프리카 탐방을 남겨두고 있다. 세상 밖을 다녀보니 여성박물관들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얼마나 상상력이 넘치던지, 그리고 얼마나 인간의 삶을 바꾸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여성사전시관에 참여한 수많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의 노력 그리고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우리도 이제는 멋진 여성사박물관을 지어야 할 때다.

 

덴마크여성박물관 기획전시관 내부.
덴마크여성박물관 기획전시관 내부.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르후스서 1982년 건립

베를린 역에서 덴마크 오르후스행 밤기차에 올라타 한참을 졸다보니 7시간 남짓 걸려 오르후스 역에 도착했다. 새벽의 맑은 공기, 가지런하게 정돈된 포장도로와 정갈한 주택들, 그리고 항구의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다가온다.

박물관에 대한 인상은 유물, 콘텐츠, 전시가 담긴 건물 그 자체만이 아니라 주위의 전경과 그곳으로 가는 여정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점에서 오르후스 여성박물관은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2016년 현재 인구 33만여 명이 거주하는 항구도시 오르후스는 면적이 우리나라로 치자면 목포시의 약 2배가 되는 곳이다.

8세기에 바이킹들이 정착한 요새로 시작해 중세에 무역을 하며 성장한 오르후스는 17세기 스웨덴전쟁 시기에 잠시 위축됐고, 민족주의가 한창 발흥하던 19세기에는 분리독립을 꾀하는 슐레스비히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나 몇 차례 프로이센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후 20세기에 들어서서 오르후스는 수도 코펜하겐의 뒤를 잇는 덴마크 제2의 도시로 발전했다. 전형적인 유럽 도시들처럼 광장을 따라 붉은색 지붕의 관공서들, 성당 건물, 상가가 늘어서 시가지의 중심을 이루었고, 덴마크 여성박물관은 도시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박물관이 시민들과 국내외 관광객들로 분주한 시가지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은 이곳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이며,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만남과 소통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박물관 현관 입구에 늘어선 자전거들은 덴마크가 자전거족의 천국임을 일깨워준다. 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의 육중한 문을 열면 오른 편으로 박물관의 연대기가 게시돼 있고 현관에 들어서면 1층 로비의 왼편으로 제법 큰 카페가 있는데 박물관 관람객뿐 아니라 오르후스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유물이 보존된 과거의 고적한 공간이 아니라, 역동적인 현재 삶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 이런 박물관을 두고 하는 표현이리라.

덴마크 오르후스의 여성박물관은 1981년 건립된 독일의 본 여성박물관에 이어 1982년에 세워졌다. 덴마크 여성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풀뿌리운동에 기반을 둔 박물관협회에서 시작해 전문박물관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역사가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만 서술됐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박물관 전시가 역사 속 여성의 역할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1980년대에 여성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유됐다.

이런 생각의 단초는 1970년대 덴마크의 여성운동에서 싹이 텄으며, 대학에서 여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면서 여성 연구는 여성박물관 건립 운동과 결합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 몇몇 이니셔티브 그룹이 협회 설립에 착수해 여성박물관협회를 만들었는데, 덴마크 여성문화사에 관한 전문적 박물관을 설립하고 여성 일자리를 만든다는 이중의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덴마크여성박물관 기획 전시 모습.
덴마크여성박물관 기획 전시 모습.

 

덴마크 여성박물관 기획전에 선보인 전시물.
덴마크 여성박물관 기획전에 선보인 전시물.

“삶을 위한 공간을 달라”

1982년 10월 31일 여성박물관협회 총회가 열렸는데, 박물관협회의 구성원은 모든 결정에서 동등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민주적 운영 방식이 실천됐다. 그후 1984년 11월에 오르후스 축제가 열렸을 때 당시 경찰서 건물로 사용되던 지금의 박물관에서 “삶을 위한 공간을 달라”는 제목의 개막전시회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다양한 여성사 문헌기록과 콜렉션을 수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년 4∼6차례의 전시회를 열어 전문적인 박물관의 위상을 다졌으며, 1991년부터는 법에 의해 국립박물관의 지위를 얻기에 이르렀다.

덴마크여성박물관의 두 번째 특징은 여성사에 기반한 세밀한 유물 수집과 여성의 구술사 수집 노력에 있다. 초창기부터 덴마크여성박물관이 겪은 모든 변화 과정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메리트 입센 관장은 “우리는 구술사가 여성의 일상생활에 관한 기록과 지식을 수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입센 관장은 7월초 국제박물관회(ICOM) 밀라노대회의 국제여성박물관협회 워크숍에 참석해 처음 만났는데, 그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덴마크 여성들과 함께 공동으로 노력한 과정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84년 최초의 전시회 개막전에 앞서 수행한 프로젝트의 하나는 모성과 가사노동에 관한 라이프스토리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를 포함해 전문연구자들은 어머니이자 실직한 젊은 여성 집단을 참여시켜 그들로 하여금 남편 도움 없이 혼자서 자녀를 양육했던 구세대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수집하도록 지도했다. 이전 세대 여성들과의 구술 인터뷰는 젊은 여성들에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돼줬으며, 이러한 공동 작업을 통해 프로젝트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경험과 방법을 공유할 수 있었다.

1980년대의 젊은 엄마 세대들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 세대들에 관한 구술사 인터뷰를 통해 정보를 모았으며, 관람객들 역시 다른 이들의 구술사를 통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 미혼모로서의 걱정 등 여성으로서 공감하는 전시회였다.

입센 관장은 “박물관이 사회의 갈등과 양면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했다”고 회고한다. 박물관은 “무엇인가를 전시하고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해 그리고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물관 전시물이 단순히 설치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공감과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84년 박물관이 건립될 당시에 처음으로 개진된 이러한 생각, 다시 말해 ‘참여하는 박물관’의 개념은 필자가 보기에 지금도 꾸준히 실천되고 있다. 최근 덴마크 사회가 당면한 핵심적인 주제들, 예컨대 이주자문제, 약물중독, 은닉된 성폭력 등의 주제들이 기획전에서 제기된다.

2층 상설전에는 19세기 중반 이후 덴마크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과 의회 참여의 역사가 전시돼 있다. 덴마크 여성박물관은 1857년에 원래 오르후스 시청이 있던 자리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경찰서 건물로 사용됐다. 덴마크의 여성들에게는 1915년에 가서야 전국적으로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이 상설전은 오랫동안 정치와 사회 등의 공적 분야에서 배제되었던 덴마크여성들의 역사를 재현하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갔는지를 보여준다. 상설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시대를 반영하듯, 내부 모습은 천정부터 바닥까지 전체적으로 견고하고 딱딱해 이른바 ‘남성적인’ 느낌이 지배적이다.

 

상설전에 선보인 19세기말 참정권운동을 다룬 전시물.
상설전에 선보인 19세기말 참정권운동을 다룬 전시물.

 

덴마크 여성박물관 근처 성당 내부.
덴마크 여성박물관 근처 성당 내부.

 

덴마크여성박물관 주변 명소의 볼거리인 프레스코화. 치료사로서의 여성을 보여준다.
덴마크여성박물관 주변 명소의 볼거리인 프레스코화. 치료사로서의 여성을 보여준다.

소년·소녀 성장스토리전

하지만 2층과 3층의 기획전은 매우 다르게 구성돼 건물이 주는 남성적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효과를 얻어낸다. 현재 2층 기획전에서는 19세기 말부터 현대까지 여성 패션의 연대기를 전시하고 있는데, 일상생활 차원에서 덴마크 사회의 변화가 재현돼 있다. 동시에 2층 전시실의 다른 한 편에서는 1970∼80년대 덴마크 여성운동의 역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년과 소녀들의 성장 스토리가 펼쳐져 있다.

3층 전시실은 마치 다락방의 아늑한 느낌을 전달하면서, 19세기부터 1960년대까지 덴마크 여성들의 결혼과 일상생활이 사진과 함께 재현되고 있으며, 관람객은 다양한 구술사 인터뷰들을 직접 듣고 과거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국제박물관협회(ICOM) 위원으로 영월국제박물관포럼에 참석한 입센 관장을 다시 만났다. 그는 덴마크여성박물관이 내년부터는 여성사에서 젠더사로 박물관 구성의 틀을 전체적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전했다. 현대사회에서 남성의 역할이 여성만큼이나 상당히 변화했으며, 크로스젠더의 수적 증가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 다양한 목소리를 박물관에 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설명이다.

덴마크 여성박물관이 지역사회에서 갖는 엄청난 영향력을 볼 때 앞으로의 변모에 사뭇 기대가 된다. 역사 속 여성의 역사와 문화의 맥락을 유지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덴마크여성박물관은 앞으로 건립될 한국여성사박물관의 중요한 역할 모델이 될 만하다.

마지막으로 박물관의 주변 전경이 그 박물관을 규정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여성박물관 바로 맞은편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인 오르후스 대성당이 있다. 1300년에 건물이 완성된 고색창연한 오르후스 성당의 건물 외벽은 세월의 두께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옆에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들 역시 수세기 동안 이 도시가 변해온 과정을 빠짐없이 보았을 것이다.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대성당이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은 여성박물관의 매력을 상승시키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여성박물관에서 나와 오르후스 주변을 걷다 보면, 도처에서 음악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어 이 도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의 도시임을 실감하게 된다. 1950년대에는 재즈음악, 1960년대에는 록음악이 유명해 1970∼80년대에는 덴마크 록음악의 총본산이 되기도 했다.

오르후스는 7월과 8월에 8일간 계속되는 국제재즈페스티벌의 고향이다. 마침 7월 중순 이곳을 들렀던 필자는 도시 곳곳에서 나긋하고 여유 있는 재즈의 음색을 즐길 수 있었다. 여성박물관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오르후스미술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더니 앞마당에 작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여성박물관 근처에서 백발성성한 뮤지션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음색의 재즈, 이리저리 편하게 둘러앉아 음악을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은 박물관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오르후스 콘서트홀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열렸으나 지금은 도시 곳곳에서 다양한 재즈 연주가 이뤄진다고 설명하는 주근깨 많은 덴마크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재즈에 문외한인 필자가 재즈의 매력에 한껏 빠질 수 있었으니 그것 또한 박물관 여행에서 얻는 큰 즐거움 아닐까.

기계형 한양대 연구교수는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 역사, 공저), 『혁명과 여성』(선인, 공저)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썼다. 현재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사무처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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