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을 사랑으로 위장하는 한국 드라마의 ‘남주’들

 

SBS 드라마 ‘우리 갑순이’에서 갑돌(송재림)이 갑순(김소은)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끌고 있다. ⓒSBS
SBS 드라마 ‘우리 갑순이’에서 갑돌(송재림)이 갑순(김소은)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끌고 있다. ⓒSBS

‘박력 스킨십’ ‘애절한 벽 키스’ 사랑으로 포장해도 폭력일 뿐

한국의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은 대부분 까칠하거나 무뚝뚝하다. 냉혈한이지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약해지는 그들은 ‘상남자’로 불리며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여자주인공에 대한 사랑을 종종 폭력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폭력은 대개 로맨스로 포장된다.

우선 제1유형. 여자의 몸에 멋대로 손을 대거나 막말을 일삼는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손목을 덥석 잡아채거나 거칠게 잡아끄는 장면은 드라마에 꼭 한 번씩 나오는 장면이다. 여자의 어깨를 꽉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협박에 가까운 언어폭력을 행하기도 한다. 드라마 안에서 남자의 폭력은 박력 혹은 여자를 향한 주체 못하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극으로 가면 신분 차이라는 설정까지 더해져 손목 잡아끌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시대 배경이 고려인 SBS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에서 ‘늑대개’라 불리는 4황자 왕소(이준기)는 해수(이지은)에게 폭력과 막말을 일삼는다.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해수를 구해주려 말 위에 태운 후 이내 곧 바닥으로 내팽개치거나 내동댕이쳐진 것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는 해수에게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나면 넌 죽어야 하는데?”라며 협박하기도 한다. 또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를 봤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해수의 목을 조르며 “날 잊어. 안 그랬다간 너도 이 꼴이 될 테니까”라고 폭력을 가한다.

8황자 왕욱(강하늘)은 극 중에서 가장 자상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해수에게 가끔 폭력을 행한다. 시정잡배들에게 죽을 뻔한 해수를 구한 뒤 왕욱은 해수의 두 팔을 강하게 붙들고 “널 잃는 줄 알았다. 널 잃을까봐 겁이 났다”고 말한다. 놀란 해수는 빠져나오려 하지만 왕욱은 더 강하게 해수의 팔을 붙든다. 상대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온몸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폭력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박력 스킨십’이라 이름 붙여져 소비됐다.

 

SBS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에서 4황자 왕소(이준기)가 해수(이지은)의 손목을 잡아챈 후 벽에 밀치고 있다. ⓒSBS
SBS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에서 4황자 왕소(이준기)가 해수(이지은)의 손목을 잡아챈 후 벽에 밀치고 있다. ⓒSBS

드라마 안에 ‘이 캐릭터는 성격이 원래 이래’ ‘안하무인일 수밖에 없는 사연을 갖고 있어’라는 설정이 이미 깔려 있기 때문에 남자주인공이 막말을 일삼거나 남에게 함부로 대하더라도 시청자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게 된다. 또 폭력 장면은 남자주인공의 멋진 외모와 로맨틱한 연출, 아름다운 배경음악으로 버무려져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사전에 차단해 버린다.

두 번째 유형. 여자주인공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표현한다. 최근 막을 내린 KBS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의 남자주인공 신준영(김우빈)은 폭력성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소위 말해 ‘까칠하고 자기만 아는 왕싸가지’ 캐릭터인 그는 여자주인공 노을(배수지)을 괴롭히는 데서 재미를 느낀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운동화를 던져 머리를 맞추는 것은 기본이다. 또 자신의 앞에서 다른 남자(임주환)를 찾는다는 이유로 등을 발로 차 넘어뜨린다.

노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내레이션에서는 “난 을이한테 계속 장난을 칠 거고 을이를 놀릴 거고 괴롭힐 거다”라며 “그렇게라도 저 아이를 보고 살아야겠다”는 이유를 댄다. 마치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좋아하기’ 때문에 여자아이를 괴롭힌다는 논리인 듯하다. 하지만 좋아하면 놀리는 게 아니라 잘해주는 게 맞다. 괴롭히고 장난치는 것은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세 번째 유형. “NO”를 “안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사랑을 강요하며, 성폭력을 절절한 사랑으로 미화시킨다. 현재 방영 중인 SBS 주말드라마 ‘우리 갑순이’에서는 첫 회부터 성폭력 장면을 로맨스로 포장했다. 남자주인공 허갑돌(송재림)과 신갑순(김소은)은 10년간 연애한 커플이다. 눈치 없고 철없는 갑돌에게 지칠 대로 지친 갑순이는 갑돌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한 갑돌이는 갑순이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끌어 벽으로 밀친다. 그러고는 “싫다”며 거부하는 갑순이의 팔을 억지로 붙들어맨 후 “나 너랑 못 헤어져. 사랑해”라며 키스를 퍼붓는다.

현실에서 벌어졌으면 명백한 성폭력이 됐을 사건이 드라마에서는 애절하고 눈물겨운 장면으로 묘사됐다. 이 장면이 담긴 영상은 포털사이트에 ‘송재림, 냉정히 돌아선 김소은 붙잡고 애절한 벽 키스’라고 이름 붙여졌다. 일부 누리꾼들은 드라마에 담긴 장면이 폭력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 누리꾼은 댓글에서 “데이트 폭력…실제로 보면 무섭기만 할 듯”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누리꾼들도 “…이거보고 애들이 싫다는 표현을 좋은데 튕기는 걸로 받아들일까 무섭다…” “뭐가 설레고 애절한 거지? 헤어지자고 통보했는데 전 남친이 저러면 진짜 끔찍할 듯” “데이트폭력을 미화시키고 있네”라고 꼬집었다.

미디어에 나타나는 폭력은 대개 사랑싸움이나 낭만적인 장면으로 그려져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는 데이트폭력을 연인 간의 사랑으로 왜곡시키고, 폭력에 둔감한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성이 실제로 당하는 폭력이나 일상에서 마주치는 공포를 로맨스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은 “미디어 교육을 하다보면 초등학생 아이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폭력성을 남자가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더라”며 “남자가 여자를 거칠게 대하는 건 멋있는 것으로, 여자가 그것에 맞춰주고 순종하는 것은 미덕이라 여긴다”고 말했다. 윤 소장은 특히 “방송에서 폭력을 로맨스로 무마하는 장면은 곤란하다”며 “남성들은 그런 장면을 보며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폭력을 행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런 인식이 확산되면 현실에서 데이트폭력이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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