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 『탄실』 펴낸 김별아 작가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인 

김명순의 일생 재조명

남성 중심 사회와 문단에서

소외돼 비극적인 삶 살아

“작가 김명순 많이 알렸으면” 

 

김별아 작가는 남성 중심의 질서 속에서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김별아 작가는 남성 중심의 질서 속에서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2005년 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받으며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김별아(47) 작가가 기록에서 배제된 또 한 명의 여성을 되살려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잠들어 있던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을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소설 『탄실』로 돌아왔다.

올해로 탄생 120주년을 맞은 탄실 김명순은 문단의 냉대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정당한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스러진 작가다. “그를 쓰는 동안 그를 닮은 많은 동료의 얼굴이 먼 별빛처럼 눈앞에 깜빡거리곤 했다”는 김 작가는 자신을 포함해 “작가라는 이름으로 사는 이들의 뜨겁고 무거운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고 고백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한 김 작가는 우리 역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백범』 『열애』 등을 펴내며 실존 인물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2010년에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역사에 휘말린 조선 청년의 이야기 『가미가제 독고다이』를 발표했다. 이후 ‘조선 여성 3부작’으로 조선 왕실 동성애 스캔들을 다룬 『채홍(彩虹: 무지개)』, 조선 양반가 간통 사건을 소재로 한 『불의 꽃』, 조선을 뒤집은 충격적 스캔들을 소설화한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를 펴냈다.

남성적이고 거시적인 역사소설과는 달리, 김 작가는 역사 기록에서 배제되곤 했던 여성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기록의 빈틈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계속했다. 남성 중심의 신분 질서 속에서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한 여성들의 행적과 가정사를 추적했고,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입체적으로 사건을 그려냈다.

학문에 대한 열정, 세상에 대한 호기심,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숨길 수 없었던 수많은 여성, 그중에 김명순이 있다. 1917년 문예지 『청춘』의 소설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돼 등단한 김명순은 심사위원이었던 이광수에게 극찬을 받았고,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소설집 『생명의 과실』(1925년)을 출간해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1928년)을 내는 등 소설 23편과 시 107편, 수필, 평론, 희곡과 번역시, 번역소설 등 여러 작품을 남겼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인신공격적 비난을 받으며 문단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일본으로 떠난 이후 잊혀졌다.

김명순은 문예지 『창조』의 첫 여성 동인이기도 했고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는 등 남성중심사회에서 꿋꿋하게 대외활동을 벌일 만큼 자의식과 자존감을 지닌 여자였음에도, 기생 출신인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모든 활동이 평가절하되고, 일본 유학 중 일어난 성폭력 사건은 가십거리로 소비됐다.

김 작가는 작품 외에는 신문기사 등의 짧은 가십으로만 남아 있는 김명순의 모습을 재조명하기 위해 김명순의 시와 소설, 희곡과 수필을 해체해 소설 속에 재조립했다. 또 작가의 모습이 가장 많이 투영된 자전적 소설과 수필 등의 에피소드를 차용해 그의 숨겨진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왜 김명순인가

“최초의 여성에 관심이 많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은 ‘최초’ 자체에 의미가 있다. 김명순에게 ‘최초의 여성 소설가’라는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학교에서도 김명순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문학사에 나오긴 하는데 오히려 나중에 근대물 시리즈를 쓰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이름이 나왔다. 이를테면 직속 선배인 거다.(웃음)”

-김명순의 작품을 소설 속에 배치했다.

“이분의 생애 자체만 보면 너무나 비극적이고 일종의 신파다. 자기 비극이 너무 컸고, 그 오해를 풀겠다는 목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제대로 된 문학적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것도 의미 있지만, 발굴되지 못한 작품에 관해서도 얘기했으면 좋겠다. 전집이 있긴 하지만 연구 목적을 벗어나기 어렵다. 독자들이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작품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고 했다.”

-대부분 작품이 미완으로 끝났다.

“김명순은 특히 소설에서 미완성 작품이 많다. 자기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적 완성이 어려웠다. 남성들이 만든 프레임 속에 완전히 갇혀버리고 그 속에서 거의 융단폭격을 맞았다. 최악으로 당했다. 김명순과 함께 근대 여성 트로이카로 불리는 나혜석과 김원주도 이 정도까지 공격받진 않았다. 김명순은 연애도 삶도 거의 누명을 쓰다시피 왜곡되었기 때문에 작품도 거길 벗어나지 못했다. 안타깝다.”

당시 김명순은 성폭력 피해자이면서도 방종하고 음탕한 여자로 취급됐다. 김 작가는 “김명순에게 내리 찍힌 불도장을 지우고 오롯한 작가이자 인간으로서의 그를 회복하려는 의도로부터 시작됐다”고 밝혔다. 여자라는 이유로, 때로는 외모와 사생활을 빌미로 사회로부터 난도질당하는 여성들은 지금도 많다. 『탄실』이 그저 김명순 개인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남성 중심적 문단에 저항해 홀로 창작의 길을 걷는 여성 작가들에겐 더 처절한 울림이 아닐까. 김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24년 전 신인 작가였을 때도 성희롱이 만연했고, 폭력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며 “나도 어렸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당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지만, 약자이기 때문에 문제 삼지 못하고 침묵하는 소수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그의 생각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나.

“어디서부터 달라졌는지 생각했는데, 9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의 책이 팔리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결국은 경제력이다. 돈이 되니까 누구도 쉽게 못 건드렸다. 성희롱이나 성폭행은 사실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문제다. 폭력의 구조 속에서 ‘이 여자를 만지고 싶어’ 보다는 ‘이 여자를 만져도 내 권력 앞에서 꼼짝 못 해’ 이걸 즐기는 거다. 이게 쾌감이 된다.”

-어떻게 극복했나.

“여성 작가들이 여러 형태로 반응했는데 나는 그 부분을 딱 잘랐다. 모임을 최대한 피했고 내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견고해진 경우다. 아예 문학에 환멸을 느끼고 작품 활동을 접거나 남자보다 더 남자처럼 행동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던 거다. 지금은 누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사회가 됐지만, 여전히 ‘건들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럴 것이다.”

-소설 분위기는 분노할 때도 차분하다.

“비극이라도 정제된 객관화를 유지하고 싶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고 싶은 마음, 내가 흥분하면 안 된다. 작가가 흥분해버리면 독자들을 끌고 가게 된다. 물론 설득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건 문학의 본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소설로 잔소리를 듣고 싶진 않으니까.(웃음) 삶이라는 건 옳고 그르다 얘기할 수 없다. 정답과 오답으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야 독자들이 김명순의 비극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김명순의 비극은 뭘까.

“미모든 재능이든 차라리 그걸 이용하려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비극으로 끝나진 않았을 거다. 희한하지 않나. 자기 미모를 무기로 사용하면 남자들은 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 무기에 이용당하거나 유혹당하거나 뮤즈로 삼지 않나. 그런데 미모와 재능을 가진 여자들이 자의식을 가지고 나 자신을 봐달라고 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자의식을 가진 여자들에겐 해피엔드가 없다.”

-시대적인 영향이 크다.

“식민지 시기엔 사회에 나오는 여자를 희귀한 동물 보듯 아주 잔인하게 소비했다. 일제강점기하면 늘 독립운동만 얘기하는데 독립운동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다 이러고 살았다. 나라를 빼앗긴 패배감과 우울감이 극에 달했고 결국, 식민지 남성들의 마지막 식민지가 여성들이었다. 좋은 사회였다면 이렇게까지 희생양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화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 소설과 별개로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발굴됐으면 좋겠다. 영화가 됐든 뭐가 됐든 좀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른 소설에선 명망 때문에 덧씌워진 주인공의 허상을 벗겨내는 데 주력했다면, 김명순은 암흑 속에서 꺼내 빛 가운데 세우는 게 목적이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문학사에서 완전히 소외된 한 인간을.”

 

김별아 작가는 『탄실』에서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의 모습이 가장 많이 투영된 소설과 수필 등의 에피소드를 차용해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이정실 사진기자
김별아 작가는 『탄실』에서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의 모습이 가장 많이 투영된 소설과 수필 등의 에피소드를 차용해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이정실 사진기자

김별아 작가는 다음 작품 구상을 묻자 “예전엔 ‘안 쓰면 못 살겠다’ 했는데 긴장이 약간 풀렸나 보다”라며 “엄두가 안 나서 못 쓰는 게 많다”고 솔직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의 긴장이 풀린 데에는 아들의 역할(?)이 컸다. 김 작가는 소문난 ‘아들 바보’다. “아들과 소설밖에 없다”는 그는 “전투적으로 글을 썼는데 애가 대학에 들어가니까 긴장이 좀 풀렸다”며 웃었다.

그는 “생계 때문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간의 공포가 있었는데 조금 편해졌다”며 “아들이 성인이 되니 ‘아, 내가 할 만큼 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은 지금 군 복무 중이다. 20년 만에 완벽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됐지만, 허전한 마음은 숨길 수 없다. 무더웠던 지난여름, 군에 있는 아들 생각에 에어컨도 못 키고 지냈다는 엄마 김별아는 요즘 국방일보에 ‘소설가 김별아가 쓰는 엄마의 병영일기’를 연재 중이다.

-많이 보고 싶겠다.

“한편으론 너무 보고 싶고, 한편으론 혼자 있으니 정말 좋다. 20년 만에 완벽하게 내 시간을 갖게 됐다. 해방감을 느낀다. 2년이 굉장히 길 것 같은데 국방부 시계가 명품 시계라서 물에 넣어도 다 가게 돼 있다(웃음). 아들은 책무를 다하고 있다.”

-글쓰기 좋은 타이밍이다.

“다음 작품은 고민 중이다. 전투적으로 작업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다. 예전에는 내 삶을 견디지 못해서 더 문학에 매달렸다. 죽음에 대한 충동도 많았고, 내면을 조절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나는 왜 이러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에 작업도 많이 하고, 백두대간도 타고, 한마디로 발광을 했다. 그 과정에서 ‘왜 이러지’에 대한 해명을 하다 보니 ‘아, 난 이렇구나’ 하고 바뀌는 지점이 있었다. 애초에 위나 장이 나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나는 이런 마음자리를 가지고 태어났구나’ 생각하니 편안해졌다.”

-글로 치유됐나.

“어느 장르든 창작만큼 좋은 치유 방법은 없다. 글, 그림, 음악 등 예술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은 없다. 사람은 끝까지 자기를 알기 위해서 살다가 가는 거다. 그래도 다 모르고 살다 간다.”

-개인적인 바람은.

“없다.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나는 일상의 인간이라서 매일매일 잘 살면 된다. 매일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아주 소소한 즐거움으로 산다. 꿈이 크거나 거대한 사람은 아니다. 아들이 무사히 제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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