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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두옥 공동대표는 7,80년대 실업여성운동을 시작으로

90년대 여성의전화에서 성폭력 상담·성교육 강사로 활약,

본격적인 지역여성운동을 펼쳐가고 있다. <사진·민원기 기자>

지역여성들과 함께 하는 여성운동가들이 늘고 있다. 지역현안을 해결하는

주체는 이제 여성이어야 하며 지역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여성

운동의 방향은 전환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가부장제

적 질서와 싸우면서 지역사회를 재편하는 데 온몸을 던지는 운동가들을 만

나본다. '편집자 주'

“중앙의 권력이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에서 지금까지 여성과 지방은 소외

와 종속의 존재였다. 이제 새시대의 패러다임은 ‘여성과 지방화’라고 볼

수 있다.”

대구여성의전화 이두옥(48) 공동대표는 이제 주변적 존재였던 지방과 여

성이 소외와 종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상적 삶의 공간인 지역에서 중심으

로 나아가야 할 변화의 세기임을 강조한다. 지역은 여성의 문제가 구체적으

로 드러나는 현장인 동시에 여성의 영역을 주변에서 중심으로 끌어낼 수 있

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늘 주변화 되어 드러내지 못했던 지역의 여

성문제를 몸소 체험하며 구체적으로 이슈화해내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

는 것이 지역 여성운동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 점에서 이두옥 공동대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지역에서 개척자 정신을 발휘해왔다.

여상시절부터 학내 복지문제 관심

금융계 여행원 공개채용 물꼬 터

“여성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현장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각오를 늘 피력하는 그의 경험은 1960년대 말 대구 구남여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두옥 공동대표는 당시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학생 자치기금을

조성하는 등 여학교내의 운동시설과 같은 복지문제에 신경을 썼다.

고3 취업실습을 마쳤던 당시에는 금융계 여행원 정식채용 시험도 없고 여

성은 거의 임시직으로나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취업기간의 성

실성을 인정받아 임시직으로 취업했고 이어 73년 농협중앙회 대구시지부 첫

공채시험에 합격해 여행원 공개채용을 허용하는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후

에는 농협중앙회 대구시지부 여직원회를 조직하고 여직원들간의 친목도모와

직장내 권익향상을 위해 힘썼다.

“결혼 후 직장생활이 자못 나태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편견을

심어줄까 걱정했기 때문에 더욱더 성실한 태도로 일했죠.”

이로 인해 근무부서장으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아 표창과 부상을 받는 등

15년간의 장기근속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금융기관 여행원이 결혼

후 계속 근무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던 초기인 70년대 말 사내의 모범사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두옥 대표가 안타까웠던 점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편견과 선입관 속에서 여성이 여성권익을 스스로 저버

리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산휴가로 인한 부당해고에 복직투쟁

여성 스스로가 일에 대한 소중함 깨달아야

대우전자 대구 신판팀에 근무할 때 동료 여성들의 참여가 아쉬웠던 그는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을 겪어야 했다. 91년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어 중

간 퇴사를 요구받고 있었다. 회사측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출산 전날까지 근

무하고 출산휴가를 받았으나 회사측은 출산휴가 중 해고통보를 한 것이다.

출산휴가 후 돌아왔을 때 상부에서는 동료들과 자신을 격리시켰고 이 대표

는 정식 근무시간 동안 빈 책상을 지키며 투쟁을 전개했다. 한달 동안 출근

투쟁을 하던 중 주변의 이목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얼마나 돈을 벌려

고...”, “무슨 여자가 저렇게 기가 센가 말이다”, “선배 이제 쉴 때도 되

지 않았나...”등등 야유와 회유가 섞인 말들만이 무성했다. 이두옥 대표는

당시 자신이 일하는 여성으로 출산휴가 요구는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즉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수 차례의 출석

심리를 거쳐 ‘출산휴가 요구로 인한 부당해고’로 판정, 승소한 후 복직했

다. 애초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바위에 계란 친 흔적이라도 남겨

야 한다’고 다짐하며 부딪쳤던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회사내의 남자

직원들은 여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주부사원에 대한 권익도 향상됐

다고 한다. 이두옥 공동대표는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상기하며 많은 여성들

이 자기 일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일자리, 자기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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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미군속에 의한 어린이 성추행 사건’을

접수받아 경찰, 시민단체와 신속한 협력끝에 미군속에게

1년 실형선고를 내리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두옥 공동대표는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것들은 언제나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잘하면 모범케이스가 될 것이고 못하면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사회에

흡수되는 것일 뿐이죠.”

때문에 끝까지 여성 인권을 포기할 수 없었고 주변 여건은 힘들지만 넘어

지고 다쳐도 다시 일어서는 성격이라 ‘오뚜기’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했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그가 여성운동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뛰어들

게 된 것은 91년 대구여성의전화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다. 주로 가정

폭력과 성폭력에 관계된 상담 자원활동을 전개했고, 이어 96년에는 대구여

성의전화 성교육 강사로서 대구 시내 중·고교 및 사회단체에서 성교육 강

의를 통해 청소년의 올바른 성문화와 가치관 형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

90년대를 재학습의 기회였다고 설명하는 그는 늦깎이로 경일대 경영학과

학부과정을 43세의 나이로 마쳤다. 98년 계명대 여성학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에서는 ‘정리해고 과정에 나타난 주부사원의 노동경험세계’라는 졸업논문

으로 그간의 여성운동을 체계화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98년 이후에는 대구시에서 실시한 ‘실업여성 위기전화’라는 프로젝트를

맡아 실무를 수행하고 실직여성가장을 위한 위기개입 집단 프로그램을 맡아

서 여성 실업문제 해결에 힘썼고, 여성가장 지지집단이 탄생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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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옥(사진 가운데) 공동대표는 올 초 대구총선시민연대

상임대표로 활동하며 시민사회단체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올 1월 대구여성의전화 공동대표로 선임된 그는 여성인권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실천함으로써 그 활동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연초 대

구지역 총선시민연대 상임대표로 활약, 시민사회단체의 기대주로 떠오르기

도 했다.

이는 4월 ‘미군속에 의한 어린이 성추행사건’을 접수받아 경찰 등 지역

단체와 적극적인 연대속에 조속한 대응을 펼친 데서도 나타난다. 결국 한미

행정협정(SOFA)의 불합리한 여건을 뚫고 지역사회의 힘을 모아 가해자인

미군속에게 1년이라는 실형선고를 내리게 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밖에도 대

구시 남구 미군부대가 있는 지역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어린이 성추행

사건에 대비하여 2천여명의 초등생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성교육을 실시하기

도 했다.

또한 5월에는 지역의 한 대학에서 교수에 의한 조교 성폭력 사건이 발생

하자 피해자의 일관된 사건 해결의지를 바탕으로 신속한 증거수집으로 대응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를 대학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연대모임으로 확

대해 하반기에는 학칙제정을 위한 공청회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

라 직장여성의 경우는 노동권까지 침해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 직장내 성희

롱 방지대책에도 적극 나설 방침이다.

이두옥 공동대표는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일구어온 지역여성운동의 개척

자로서, 여성인권문제 해결이 삶의 질로 거듭날 수 있는 지역공동체 만들기

에 온 정열을 쏟고 있다.

[김강 성숙 기자 annykang@womennews.co.kr]

- 이두옥 이력

91년부터 대구여성의 전화 회원 활동 시작,94년 감사와 이사 역임, 96년부터 '성교육 강사'로 활동.

98년 계명대학교 여성학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2000년 1월 대구여성의 전화 공동대표로 선임.

2000년 대구총선시민연대 상임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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