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사박물관 탐방은 국내에서 추진 중인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에 맞춰 기획됐다. 미국은 여성관련 전시관 혹은 박물관의 최다 보유국이자 박물관을 운영한 지가 오래돼서 국립여성역사박물관 콘텐츠 개발을 위한 벤치마킹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탐방을 다녀왔다. 박현숙 성균관대 초빙교수가 우선 첫 회로 수전 B 앤서니 박물관을 소개한다. 다음호에는 여권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은 세네카 폴즈, 여권선언문을 발표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 자택, 미국여성명예의 전당을 담은 탐방기를 싣는다.<편집자주>

“여성 참정권 운동을 멈춰선 안 된다… 실패는 없다!”

명연설로 깊은 영감 남긴 여권투쟁가 수전 B 앤서니

 

노예제 폐지 운동가, 금주운동가로도 맹활약

“미국인 중 최초로 대통령선거서 투표한 여성”

스탠튼과 함께 여성 참정권 투쟁… 사후 14년만에 결실

 

수전 B 앤서니가 살았던 자택 앞에서. 맨 오른쪽이 필자인 박현숙 성균관대 초빙교수.
수전 B 앤서니가 살았던 자택 앞에서. 맨 오른쪽이 필자인 박현숙 성균관대 초빙교수.

실패는 없다(Failure is Impossible).

평생을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해 투쟁해 온 인물인 수전 B 앤서니(1820~1906년)가 사망하기 한 달 전에 한 말이다. 필자는 평소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업적에 찬탄을 금하길 없었던 차에 자택을 방문해 감회가 남달랐다. 그의 삶의 궤적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 했다. 바로 이점이 한때는 그의 집이었고, 지금은 박물관이 된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는 의미가 아닌가 싶었다.

그 흥분은 지금도 가슴에서 고동치고 있다. 미국 여성들은 참정권 획득을 위해 거의 80년을 치열하게 투쟁했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1920년 참정권을 획득했다. 그 투쟁의 선두에서 참정권 획득을 위해 자신의 전 인생을 헌신한 사람이 수전 B 앤서니였다. 그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라는 꿈이 실현될 것을 굳게 믿었기에 사망하기 한 달 전에 한 연설에서 “실패는 없다”는 말을 했고, 이 말은 후대 여권투쟁가들의 좌우명이 됐다.

 

수전 B 앤서니(서 있는 사람)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 평생을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한 미국의 대표적 여성운동가다.
수전 B 앤서니(서 있는 사람)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 평생을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한 미국의 대표적 여성운동가다.

스탠튼과 운명적 조우 

수전 B 앤서니의 박물관이 위치한 로체스터시에 앤서니 가족이 이사온 것은 1845년이다. 만인의 평등을 믿는 퀘이커 집안에서 성장한 수전은 당시로는 흔치 않게 여성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자퇴한 후 17세때 저임금을 받고 교사직을 시작했다. 1843∼1849년 캐나조하리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던 수전은 당시 남자 교사의 임금의 4분의1을 받고 가르치면서 남녀 차별을 일찌감치 체험한다. 이러한 경험이 나중에 교사 회의에서 남녀 교사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849년 로체스터의 가족농장으로 돌아온 수전은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 유명한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윌리암 로이드 개리슨을 만났고, 1851년 뉴욕의 시라큐즈에서 열린 반노예제 회의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스탠튼은 1848년 뉴욕의 세네카 폴즈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창한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여권투쟁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72년간 여성참정권 투쟁의 추진세력이 됐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평소 술이 가난뿐 아니라 부인과 아이의 학대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해 1853년 주류 판매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2만8000명의 서명을 받아 주 입법부에 제출하지만 거절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수전은 여성 투표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수전 B 앤서니(오른쪽)와 노예제 폐지운동가 프레데릭 더글라스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수전 B 앤서니(오른쪽)와 노예제 폐지운동가 프레데릭 더글라스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여성참정권협회 본부 표지판. 수전 B. 앤서니 자택 앞에 세워져 있다. ⓒ박현숙
여성참정권협회 본부 표지판. 수전 B. 앤서니 자택 앞에 세워져 있다. ⓒ박현숙

기혼여성 재산법 통과 결실

수전은 1856년 반노예제 협회의 활동가로 모임을 조직하고, 연설을 하고, 포스터를 붙이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적대적인 군중들의 협박을 받고, 그의 인형이 교수형 당하고, 그의 상이 거리에서 끌려 다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위해 투쟁했다. 급기야 스탠튼과 함께 뉴욕주 여성 60만명의 서명을 받아 1860년 뉴욕주에서 기혼여성 재산법이 통과되는 성과를 달성했다. 기혼여성 재산법으로 뉴욕주의 기혼 여성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들의 임금을 관리할 수 있었고, 아이의 양육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평생동안 이루고자 한 목표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었다. 반노예제 단체와 연대해 반노예제 투쟁을 벌이던 두 사람은 1863년 수정조항 13조의 통과로 노예제가 불법화되고, 이어 수정조항 14조와 15조의 통과로 흑인남성에게 시민권과 투표권이 부여되지만 여성 투표권을 얻지 못하자 이들과 결별하고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한 투쟁을 펼치게 된다. 수정조항 15조 통과로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분열해 각각의 조직을 만들었지만 두 조직은 1887년 통합했고, 1892년 초대 회장을 지낸 스탠튼에 이어 수전도 회장으로 취임했다.

스탠튼과 함께 연방 차원의 여성참정권 획득이 목표였던 수전은 1869년부터 1906년까지 여성참정권 수정조항의 통과를 요구하며 매년 의회에 출석했다. 그런 이유로 워싱턴의 봄은 빨간 가슴의 울새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빨간 숄을 하고 악어 가죽백을 든 수전 B 앤서니의 출현에서 알게 된다는 말까지 생겼다.

그러나 수정조항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통과되지 않았다. 86세의 수전은 1906년 2월 3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전국여성참정권협회의 연례 회의에 참석했다. 내년 작업을 위해 회계 담당자가 모금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말을 들은 수전은 연단에 섰고, 10분간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이어 수전은 자신의 지갑을 내밀며 로체스터를 떠나기 전 친구들이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86달러를 내게 줬는데, 이 돈을 오레곤을 위해 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여기 잠시 머무를 것이고 나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투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투쟁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실패는 없다!”

이 연설이 마지막이었다. 너무 과로한 탓에 수전은 병에 걸렸고, 병세는 폐렴으로 발전했다. 그는 3월 13일 메디슨가의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수정조항 19조는 수전이 사망한지 14년 후 통과됐고, 그 법안은 앤서니 수정조항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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