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북제주군에서 ‘다랑쉬굴’이 발견되자 정부는 서둘러 굴의

입구를 막았다. 다랑쉬굴에는무엇이 있었을까?

47년, 유엔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유엔의 결정을 조속히 실시하라는 이승만·한민당 진영과

남북 모든 정당의 합의하에 독립정부를 실시하자는 김구의 한독당

및 좌익진영의 팽팽한 대결로 정국은 치달아갔다. 48년 2월, 유엔 한

국 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자 노동자들

은 전국적인 총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의 영향은 농민, 사무원, 학생

으로 번져 미군정 경찰기구와 극우파 테러단체 사무소의 습격 등의

무력투쟁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남로당은 단정 단선 반대 봉화, 삐라 살포, 기습 시위 등을 일으키

며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전화시켰다. 결국 육지의 좌익계 인물들

이 한라산으로 후퇴해 산악을 근거로 한 게릴라 투쟁을 시작함으로

써 한반도는 내전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빨갱이 사냥’을 개시했다. 이것이 27만 제주도민 중 3만명이(어

떤 자료는 5만이라고도 하고 다른 자료는 8만이라고도 한다) 무차별

적으로 학살된 ‘4.3 항쟁’의 배경이다.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는 다랑쉬굴에서 발굴된 수십명의 유해로

부터 시작된 의문, ‘48년 4월 제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주도민의 시점으로 4.3항쟁을 다뤘던 이전의 다

큐멘터리들과 달리 이 영화는 비교적 ‘객관적’ 시점을 견지하고

있어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별다른 소음 없이 상영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자 문제가 일어났다. ‘레드

헌트’는 이적표현물로 규정됐고 인권영화제 주최자인 인권운동사랑

방의 서준식 소장은 구속됐다. 영화를 먼저 상영했던 부산영화제 주

최측은 물론 해당영화의 연출자조차 구속수사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서 소장에 구속된 것이다. 4.3항쟁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문제

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인권’을 말하고자 하면 문제가 된다

는 것일까?

‘레드 헌트’가 이적표현물로 규정되고 서씨가 구속된 사건이나 그

뒤의 불합리한 논리가 새삼 새로울 것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늘상

그래왔지 않은가’ 하는 체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

나 4.3 항쟁을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를 생각해 보면 ‘레드 헌트’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의

의미는 작지 않다. ‘레드 헌트’와 서씨의 구속을 말해야 하는 이

유도 거기 있다. 즉 다시는 그 시간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이나마 얻

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또 언론의 외면 속에 되살아나

는 ‘레드 헌트’의 망령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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