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생활 끝내고

연극 무대 돌아가

환갑 넘긴 나이에

여섯 번째 햄릿 도전

“새로운 실험무대 만들 것”

 

배우 유인촌은 2012년 예술의전당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떠나 자유로운 연극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그린디자이너 윤호섭 교수가 직접 그린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이정실 사진기자
배우 유인촌은 2012년 예술의전당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떠나 자유로운 연극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그린디자이너 윤호섭 교수가 직접 그린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이정실 사진기자

“웃으시겠지만, 장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포클레인, 지게차 면허를 땄다. 내가 직접 돌 하나까지 다 나르며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예술가들이 활동하게 하고 싶다. 아직 그 꿈은 가지고 있다. 기운이 더 떨어지기 전에 해야 할 텐데.”

만 65세, ‘연극배우’ 옆엔 ‘전 장관’이 늘 따라붙는 배우 유인촌을 만났다. 흰 머리가 60대임을 상기시켰지만, 얼굴부터 패션, 꿈꾸는 모습까지 그는 ‘청년’이었다. 반소매 티셔츠에 최신 유행이라는 밑단 커팅 청바지, 흰색 운동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2012년 예술의전당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떠난 그는 요즘 자유롭다.

유인촌은 지난 7일 16년 만에 맡은 생애 여섯 번째 ‘햄릿’을 마쳤다. 이해랑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이었던 이번 무대는 역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인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윤석화 등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65세 햄릿은 물론, 연극의 역사를 써온 최고의 별들이 총출동한 만큼 관객 반응은 뜨거웠다.

개막한 지 사흘 만에 모든 자리가 매진됐고, 객석 점유율 100%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또 9명의 백전노장이 보여준 2시간 40분 공연이 끝날 때마다 전회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1999년 이후 환갑을 넘어 햄릿을 맞은 유씨는 나이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65세의 햄릿 어땠나.

“젊을 땐 못 느낀 것들을 정말 많이 느끼면서 연기했다. 예전에는 겉으로 많이 드러내고, 화려한 제스처와 볼거리를 강조했다면 이번에는 내적인 진실 외에 다른 장식은 다 없앴다. 역시 세상을 많이 살고 나이가 돼서 그런지 쓸데없는 겉치장은 안 하게 되더라.”

-나이가 실감이 되나.

“아직 인식은 안 하고 사는데 물리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젊은 척해도 육체적으로 젊은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이 무대 배우로 전성기다. 희곡은 작가가 많은 것을 압축해서 썼기 때문에 그 말을 소화하려면 삶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셰익스피어 정말 힘들다. 햄릿이 쉬운 것 같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고민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젊은 나이에 그 고민을 다 이해하긴 힘들다.”

-연기 영역이 더 넓어진 느낌이다.

“이제는 리어왕 같은 연극을 해야 할 나이다. 맥베스, 템페스트, 태풍 이런 작품들도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작품은 우리 역사와 관련된 연극이다. 극단을 처음 만들었을 때 올렸던 연극도 ‘문제적 인간 연산’이었다. 소재를 찾고 작가에게 의뢰해서 1~ 2년 기획해보려 한다. 시적인 대사로 극적인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서사극을 하고 싶다. 다 흥행하고는 관계가 없다.(웃음)”

 

연극 전용 극장 ‘유시어터’를 운영하는 유인촌은 뮤지컬과 음악, 무용 등 실험적이고 새로운 창작 공연에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정실 사진기자
연극 전용 극장 ‘유시어터’를 운영하는 유인촌은 뮤지컬과 음악, 무용 등 실험적이고 새로운 창작 공연에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정실 사진기자

“하고 싶은 연극 실컷 하고파”

유씨는 1999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연극 전용 극장 ‘유시어터’를 지었다. 지하 2층, 지상 5층 건물로, 당시 30억원이 들어간 대공사였다. 출연료와 광고 모델료 등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 단원들이 함께할 공간을 만들자는 낭만적인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IMF가 터져 건설사가 부도를 맞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강남 관객이 별로 없는 현실과도 마주해야 했다. 극장 유지 문제로 정작 하고 싶은 연극을 못할까 걱정한 날도 많았지만, 유시어터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시어터는 연극은 물론 뮤지컬과 음악, 무용 등 실험적이고 새로운 창작 공연에 문을 활짝 열었다. 지난해에는 개관 15주년 기념으로 1일 1만원의 ‘대관료 인하 프로젝트’를 진행해 큰 호응을 얻었다. 100∼250석의 서울 대학로 소극장 대관료가 50∼80만원 선이니 예술가들에겐 파격적인 지원이다. 올해도 공모를 통해 선정한 11개 창작단체에 1만원 대관을 이어갔다.

-극장을 만든 이유는.

“공연장을 통해서 수익을 올린다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었다. 극장의 가장 큰 목적은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대로 한번 해보자는 거였다. 대관하면 제약을 많이 받는다. 사용하고 싶은 만큼 쓰지도 못하고, 다 돈하고 연결돼 힘들다. 극장을 만들어서 흥행이나 상업적인 것을 배제하고 꼭 하고 싶은 작품을 하겠다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 사람 키우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습하고 오히려 실패를 더 많이 하면서도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유시어터 출신 배우가 많은가.

“주진모, 공형진, 박선영, 김수로 그리고 요새 주가를 올리는 김민교 등 굉장히 많다. 김민교는 극단에서 고생 많이 했다. 그런 또래들은 굉장히 많다. 그 외에도 무대 스텝이나 조명, 음향, 기획 분야 등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극장 유지가 힘들지 않나.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짓이었다. 새로운 관객을 만나고 싶어서 이곳을 택했는데 새로운 관객이 안 만나진다. 그동안 여러 번 옮겨보려고 했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옮길 거다. 완벽한 극장보다는 스튜디오 개념의 무대를 만들고 싶다. 연습도 할 수 있고 공연도 할 수 있는, 쓰임새가 다양하고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

-연극계는 늘 어렵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관객이 제한돼 있고, 하루에 한 번밖에 못하지 않나. 이미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자립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한계 속에서 예술적인 가치를 찾고 유지하려면 결국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기업 더 넓게는 관객까지 함께해줘야 한다. 부족분만큼의 수혈이 지속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희망적인가.

“이번 햄릿 공연만 해도 뮤지컬처럼 세트가 변하거나 화려한 뭔가가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졸릴 수 있는 순전히 언어 연극으로 만들었는데 대부분 관객이 ‘정말 연극다운 연극을 봤다’고 얘길 하니까 희망이 있는 거다. 평생 한눈팔지 않고 연극만 한 배우들이 모여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연극은 배우의 몫이 크기 때문에 쉽고 편안하게 가려는 배우는 남아있기 힘들다. 고행길을 가야 좋은 연기술을 볼 수 있다.”

-연극만 할 생각인가.

“드라마나 영화를 안 할 생각은 아닌데 지금은 세대교체가 돼서 내가 하려고 해도 할 게 없다.(웃음) 더 나이를 먹은 후에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재로썬 무대에서 할 일이 더 많다. 또 장관이라는 자리가 어쨌든 나를 굉장히 무겁게 만들었다. 장관 끝나고 나와서는 앞으로 10년간 연극에 몰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0년 이후에는?

“그때도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기운이 있어야 하니까. 이순재 선생님을 보면서 잘 관리하면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선생님은 80세가 넘었는데 드라마, 연극 그리고 강의까지 정말 왕성하다. 그런 분을 보고 희망을 갖지만,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나. 암기능력이나 체력이 떨어질 수 있고, 장담 못 한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책임감을 갖고 무대 연기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

 

연극 햄릿 연습현장. 배우 유인촌(오른쪽)과 정동환이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ㆍ여성신문
연극 햄릿 연습현장. 배우 유인촌(오른쪽)과 정동환이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ㆍ여성신문

“공직 생활 후회 없어”

“나는 적당히 걸쳐놓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씨는 이명박 정권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초대 장관을 맡으면서 연극 무대와 7년간 몸담았던 중앙대 예술대학 교수직을 모두 내려놨다. “다른 생각을 안 했다”는 그는 공직에만 충실했다.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도 역임한 유씨는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공적에 대해선 아쉬움을 내비쳤다.

-저평가된 정책도 많다.

“당시 저작권 문제로 내가 얼마나 공격받았는지 모른다. ‘인터넷을 통제하고 감시한다’ ‘인터넷에 재갈을 물린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저작권 침해 대부분이 인터넷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법 개정을 안 하면 바꿀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노력으로 우리가 저작권 감시대상국 딱지를 뗐고 이제는 저작권에 있어서는 적어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고 본다. 물론 아직 미흡한 점은 있지만, 당시 법적인 제도 정비는 다 했으니까….”

-학교 체육도 다 바꿨다.

“운동선수가 공부 안 하고 운동만 하는 건 절대 못 하게 했다. 축구, 야구는 주 중에 시합을 못 하게 하고, 주말 시합을 하게 했다. 그때도 반대가 많았다. 학부모와 감독, 코치들은 ‘애들 대학은 어떻게 가나’ 걱정했고, 각 언론사가 운영하는 유명한 시합을 포기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 설득이 되고 도와줘서 체육행정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당장은 실력이 떨어질까 우려하지만, 5~10년 기다리면 좋은 아이들이 나온다.”

-후회는 없나.

“나 같은 사람은 굉장히 단순하다고 할까, 아니면 감정적이라고 할까…. 흰색이면 흰색이고 검정이면 검정인 사람이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한 것들에 관해 얘기하는 편이었는데 (정치권에선) 옳다고 얘기하는 것도 옳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다. 사람들은 나보고 속상해서 어떻게 하냐고 그러는데 난 하나도 부담스럽거나 속상하지 않다. 근본과 다 다르고, 왜곡된 것들이기 때문에.”

-공적인 일을 하기 전부터 지역 문화 융성에 관심을 가졌다.

“2004년 9월 강원도 봉평면 폐교에 공연장을 만들기도 했다. 지역 공연은 오래전부터 나의 꿈이기도 했고, 지역과 서울과의 문화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고 싶어서 꽤 많은 시도를 했다. 실제로 공직서 물러난 후에 서울보다 지역에서 공연을 많이 했다. 사람들은 이번에 햄릿으로 복귀한 줄 알더라. (웃음) 톨스토이, 파우스트, 오페라 등 많은 작품으로 전국을 다니며 공연했다.”

-지역에서 파우스트 공연은 어렵지 않나.

“부안, 해남, 삼척, 울진 등 지역의 문화예술회관 관계자들도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해보자고 했는데 기립박수를 받았다.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나와 같이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은 절대 그 공연을 잊지 않을 거라 믿는다. 결국 어렵다 안 어렵다, 고급예술이다 대중예술이다 이런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대에서 어떤 마음으로 공연하는가가 중요하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내 손으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 포클레인으로 작은 호수도 만들고 호숫가 주변으로 야외무대도 만들고 꿈은 되게 많다. 공연장은 창고처럼 지어서 벽도 열리고, 지붕도 열리고, 전기도 안 쓰고 햇빛이 스포트라이트가 되고…. 별 엉뚱한 꿈을 많이 꿨다.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맞춰서 연출하면 되니까. 물론 아내는 반대한다. (웃음) 옛날엔 내가 뭘 해도 응원하고 절대로 반대 안 했는데 요즘엔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고생 그만하자고. 그래도 나를 제일 응원하고 격려하고 손뼉 쳐주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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