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이화여대에서 여성신문 주최 스리랑카·예멘·이라크·인도의 여성인권운동가 4인 좌담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파티마툴카하르 알리 엠. 후세인 알-카니(이라크), 리합 야히아 파라 살람 알살가비(예멘), 모니카 한젬밤(인도), 웨기리야 위라소리야쥐 파드미니 니로쉬카 웨기리야(스리랑카).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8일 이화여대에서 여성신문 주최 스리랑카·예멘·이라크·인도의 여성인권운동가 4인 좌담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파티마툴카하르 알리 엠. 후세인 알-카니(이라크), 리합 야히아 파라 살람 알살가비(예멘), 모니카 한젬밤(인도), 웨기리야 위라소리야쥐 파드미니 니로쉬카 웨기리야(스리랑카).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스리랑카·예멘·이라크·인도 여성인권운동가 4인 좌담회 ②

여성들, 재난 속 평화 중재·사회 변혁 주체로 나서다

전후 평화 재건 성공하려면 더 많은 여성 참여 보장해야 

여성들이 필요한 건 더 많은 초국적 연대

남성의 지지와 도움 없인 폭력의 악순환 못 끊어

(이어보기 ▶ ① “남자들이 벌인 전쟁...이제 여자들이 평화의 디딤돌 쌓아야”)

최형미 : 내전과 테러 등 재난 발생 시 여성의 피해가 남성보다 훨씬 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전쟁 폭력에 저항하고 피해 극복과 평화 재건에 기여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역할이 간과되선 안된다.  

웨기리야 : 그렇다. 모든 여성이 단지 수동적인 피해자로 살아간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 콜롬보로 온 여성들이 여성 임파워먼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인권·평화 활동가로 성장했다. 

알-카니 : 이라크 야지디족 여성으로 IS에 납치당해 성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Nadia Murad Basee Taha)라는 여성이 있다. 지난해 12월 UN에서 IS의 만행과 야지디족 여성의 비극을 최초로 진술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라크 여성이 자신이 겪은 강간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라크 사회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당황스러운 일이다. 대단한 여성이다. 

한젬밤 : 마니푸르엔 군인에게 이유 없이 살해당한 민간인들의 유족이 모여 결성한 단체 EEVFAM(Extra Judicial Execution Victim Families Association)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은 여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애도하다가 만든 단체다. 이들은 인도 전역과 UN을 오가며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다른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정규 교육을 못 받은 여성들이지만, 연설·시위 등에 활발히 나서면서 사회를 바꾸고 있다. 인도 군대의 무차별적 민간인 살상 행위에 대한 재판도 이들의 노력 덕에 시작됐다.  

알살가비 : 예멘 국내 실향민 대다수가 여성이다. 일부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소규모 토론 그룹을 꾸려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단결했다. 자신들의 처우 개선과 평화를 위한 비전을 형성했고, 더 큰 규모의 조직들과 접촉해 인도적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여성이 평화 재건 과정에서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한젬밤 : 그렇다. 여성은 중요한 평화 중재자다. 여성에겐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대화와 협력을 끌어내고 메시지를 전하는 능력이 있다. 마니푸르 여성들은 20세기부터 다양한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독재정권의 강제노역, 지나친 과세와 알코올·약물 중독 문제, 군대의 강간 등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고 목소리를 높였다. 평범한 엄마, 딸들이 열혈 전사로 변신했다.

여성이 일어서면 가족과 마을이 변화한다

알살가비 : 개발과 평화, 보안과 인권 문제를 논하면서 여성을 빼놓을 수 있을까? 단, 여성이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때에야 여성의 참여가 가능하다. 여성이 갈등과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사회 재건 과정에 참여하지 못해 소외될 것이다. 내가 속한 예멘의 NGO ‘Vision for Development’는 내전으로 가장이 된 여성 500명이 마을에 남은 가축을 활용해 낙농업 사업을 벌여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면 많은 변화가 함께 온다. 여성들은 교육받을 권리, 일할 권리, 옷차림의 자유 등에도 눈을 떴다. 한 여성은 “처음으로 ‘안돼’ 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여성 임파워먼트는 여성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지역사회도 변화시킨다. 예멘과 국제사회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러한 동학을 이해해야 한다. 

알-카니 : 공감한다. 나와 반 가정폭력 단체 ‘Speak Now’ 활동가들도 그러한 취지에서 이라크의 고등학교들을 찾아가 성평등 교육을 해왔다. 여성도 리더가 될 수 있고, 남자답기 위해 폭력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즘은 가정폭력 피해자들과 의사·전문가를 연결해 피해 회복과 폭력 재발 방지에도 힘쓰고 있다. 

웨기리야 : 스리랑카 시민사회단체들도 우리처럼 내전의 고통을 겪은 남아프리카, 캄보디아, 네팔 등지의 활동가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내가 속한 인권단체 ‘Law and Society’는 내전으로 가족을 잃은 여성들에게 법적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곧 대통령 직속 TF에 정책 제안도 할 계획이다. 내전으로 가족을 잃고 남겨진 이들 대부분이 여성, 아동, 노인이다. 정부는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 법적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이들이 기초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법적으로 유효한 실종선고 서류를 하루빨리 발행해 여성들이 자산 소유권 이전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여성뿐 아니라 많은 남성 활동가·변호사 등이 젠더 폭력에 맞서 행동하고 있다. 

 

예멘 NGO ‘Vision for Development’ 프로젝트 매니저인 리합 야히아 파라 살람 알살가비(Rehab Yahya Fara Sallam Alshargabi)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예멘 NGO ‘Vision for Development’ 프로젝트 매니저인 리합 야히아 파라 살람 알살가비(Rehab Yahya Fara Sallam Alshargabi)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라크 반 가정폭력 단체 ‘Speak Now’ 공동 창립자인 파티마툴카하르 알리 엠. 후세인 알-카니(Fatimatulzahraa Ali M. Hussein Al-Kani)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라크 반 가정폭력 단체 ‘Speak Now’ 공동 창립자인 파티마툴카하르 알리 엠. 후세인 알-카니(Fatimatulzahraa Ali M. Hussein Al-Kani)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알살가비 : 중요한 지적이다. 젠더 폭력을 해소하려면 남녀 모두가 나서야 한다. 남성은 젠더 폭력의 원인이기도 하므로, 해결책 마련에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여성이 겪는 차별뿐 아니라 남성에 의한 남성 차별도 심각한 문제 아닌가. ‘Vision for Development’는 여성 주도 조직이지만 수많은 남성 자원 활동가들과 함께한다.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캠페인 전략을 짜는 것도 중요하다. 

한젬밤 : 그렇다. 여성 간 연대 강조가 남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남성 없이는 온전한 정의와 평등을 실현할 수 없다. 남성의 이해와 도움이 없다면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될 뿐이다. 남성들은 여성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으며,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오늘 이 대화에서도 드러났듯이 전쟁·분쟁 지역 여성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이런 여성들 간 국제적 연대 형성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지역의 분쟁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시야를 넓혀 다른 지역의 문제와 해결 사례를 찾아보면 우리 지역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경험이 풍부한 다른 시민사회단체를 통해 UN에 로비를 하는 등, 국제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여러 방도를 찾을 수도 있다. 

알-카니 : 사실 이라크 활동가들은 ‘너는 못 할 거야’ ‘공간도 영향력도 없는데 뭘 하겠어’ 처럼 힘 빠지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각국 활동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운동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며 이라크 야지디족 여성들을 떠올렸다. 무척 감명을 받았다. 

한젬밤 : 우리에겐 더 많은 초국적 연대가 필요하다. 마니푸르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조직적 폭력을 끝낼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문제다.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여성의 몸은 폭력의 대상이 아니며, 누구도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충족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다.

최형미 : 남성들이 만든 독점과 폭력이 전쟁과 분쟁으로 폭발해 우리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 기존 남성 중심적 문화로는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 전쟁과 분쟁, 재난의 가장 큰 피해자면서도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일궈나가는 여성의 힘은 곧 희망이다. 희망은 연대를 통해 자란다. 우리가 연대할수록 희망도, 영향력도, 평화도 전 세계로 더욱더 확산될 것이다. 오늘 모인 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또 연대하며 평화의 디딤돌을 놓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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