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가 16일 이대 국제교육원 LG컨벤션홀에서 제자, 동료 학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생명, 사회, 정의를 위한 여성학’이라는 주제로 고별 강연을 하고 있다.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가 16일 이대 국제교육원 LG컨벤션홀에서 제자, 동료 학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생명, 사회, 정의를 위한 여성학’이라는 주제로 고별 강연을 하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의 첫 여성학 교수인 장필화(65)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가 16일 이대 국제교육원 LG컨벤션홀에서 제자, 동료 학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생명, 사회, 정의를 위한 여성학’이라는 주제로 고별 강연을 했다.

장 교수는 신생 학문인 여성학의 길을 낸 개척자로서의 경험부터 주류 학문세계에서 겪은 좌절, 앞으로 천착할 연구 주제인 ‘생명과 사랑, 정의’에 이르기까지 차분한 목소리로 강연을 이어나갔다.

장 교수는 “30년 넘게 여성학을 했으니 고별 강연에 뭔가 체계적인 이론을 내놓기를 기대한다면 죄송하지만 실망할 것”이라는 말로 참석자들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그러면서 “서른세 살에 여성학과 교수가 돼 현실의 준엄함에 대한 인식보다 무엇이든 못할 게 없을 것만 같은 겁 없음과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무사히 정년까지 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아낌없는 도움과 축복과 기도 덕분”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장 교수는 “대학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큰 특권을 누린 저는 작은 월급으로 시민사회에서 실무자로, 자원 활동가로 일하는 이들에게 늘 빚진 마음을 가져왔다”며 “조금이나마 보답하면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며 속내를 들려줬다.

‘이화의 여성학 운동가’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회고할 때는 잠깐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 장 교수는 “돌아보면 재직기간 첫 부분에는 여성학을 실험하고 정의하고 알리고 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것 같다”며 “여성학 초기에는 여성학운동이라는 말을 피부로 느끼는 시기였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까지는 전국 대학 여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여성학을 자기 대학에서 개설하고 여성학 전공자 강사를 초빙할 수 있을까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연구실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전국 100여개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됐고 이들의 강사 초빙 청탁에 다 응할 수 없었다. 왕복 10시간도 넘는 대학에 출강하는 것을 여성학 전파를 위한 여성학 운동으로 생각한 여성학 석사들은 한학기가 끝나면 녹초가 되어 보약을 먹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과 아시아의 첫 여성학 교수인 장필화 교수는 고별 강연에서 “이화의 여성학 운동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과 소중한 경험을 나눠준 이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과 아시아의 첫 여성학 교수인 장필화 교수는 고별 강연에서 “이화의 여성학 운동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과 소중한 경험을 나눠준 이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 교수는 얼마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고 절망스러웠던 때가 언제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그때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좌절의 경험은 참 많았던 것 같다. 주로 이론적으로 구성해 낸 소망 사항이 현실이라고 착각했다가 그 착각이 깨질 때 좌절했던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이화가 여성교육을 처음 시작했고, 이화는 그 전통과 경험을 심화시켜 여성학을 만들어낸 학교이고, 그러므로 ‘이화는 여성주의적 학교다’라는 삼단논법을 혼자 만들어내고 그 전제를 믿고 기대어 일하다가 그것만이 아닌 현실에 부딪혔던 때 좌절했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장 교수는 “여성주의적 학교여야 한다는 규범적 당위성과 아직 거기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 때문에 때론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며 “하지만 이대에 입학한지 46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이화는 여성주의적 학교’라는 소망과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후배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장 교수는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근거는 매우 미약하다. 법제도나 통계적으로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할 근거는 없다”며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가부장제의 전통을 벗어나서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을 내면화하려면 아직도 세월이 필요하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 교수가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 것’이라고 인상 깊은 지적을 했듯 한국의 미래를 탄탄히 준비하기 위해 여성교육이 더 향상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교육은 여성학을 기초로 할 때 더 발전하고 강화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며 “생명의 가치, 정의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학의 토대 위에 새로운 학문, 연구, 교육 체계를 만들어가야 우리 사회와 글로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마지막으로 “지난 30년간 여성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서론’을 쓰는 여자로 살았다면 이제 우리 여성들의 힘의 원천, 생명의 사회에 대해 더욱 집중하려고 한다”며 “생명과 사랑과 정의의 여성학을 위하여, 샬롬!”이라는 말로 고별 강연을 끝맺었다.

 

장필화 교수가 고별 강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필화 교수가 고별 강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아래는 고별 강연 ‘생명, 사회, 정의를 위한 여성학’ 전문.

고별 강연에는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30년 넘게 여성학을 했으니 고별 강연에는 뭔가 체계적인 이론을 내놓기를 기대한다면 죄송하지만 실망하시겠어요.

그보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끌어주고 도와주신 분들께 드리지 못했던 감사 말씀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성학이라는 신생 학문의 첫 교수로서 겪었던 경험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 더 공부하고 싶은 주제, 생명과 사랑과 정의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축복, 기도에 감사

저를 정년까지 소임을 다하고 끝낼 수 있게 해주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던 30대 중반에 여성학과 교수가 되어 현실의 준엄함에 대한 인식보다는 무엇이든지 못할 게 없을 것만 같은 겁 없음과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출발했었는데 무사히 정년까지 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도움과 축복과 기도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여성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만들고 성장하게 해주신 이화의 선구자들, 선배님들, 동료교수님들, 여성학과 석‧박사 졸업생들 그리고 재학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처음으로 여성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동기를 주신 고 강원용 목사님, 여성들 간에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장과 유학의 길을 열어준 크리스찬아카데미와 독일 장학재단, 그리고 이화에서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교수로 불러주신 정의숙 선생님, 여성학과와 아시아여성학센터를 설립해 주신 윤후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윤후정 선생님께서는 여성학 이론의 초석을 놓으시고 여성학 제도화의 주역이셨습니다. 처음에 여성학과를 학부에 두고자 하셨지만 대학원부터 시작하게 돼서 자못 애석해 하셨지만, 몇 년 후에는 대학원장으로 박사과정을 개설하셨습니다. 또한 초대 여성학회장으로 전국 여성학자들의 여성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제가 여성학과 전임교수로 혼자 외로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확대 교수 회의라는 이름으로 학사운영의 모든 안건을 함께 의논해 주신 정세화, 정대현, 조형, 서광선, 최숙경, 이상화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초기에는 다른 대학의 교수님들도 한 마음으로 함께 여성학 교과과정을 만들어 가는데 힘을 합했습니다. 조은, 조한혜정, 조옥라, 이영자, 정진경 교수님들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여성학과 대학원 수업을 위해 새로운 과목을 개발하고 팀티칭에 참여해주시고 논문 지도까지 맡아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얼마나 값진 협력의 기억이었는지 앞으로 올 차세대에서도 협업이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기를 희망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5년에 이화여대와 한국여성학회가 공동주최한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해준 신인령 총장님을 비롯한 교직원 여러분, 한국여성학회 회장님들, 100명이 넘는 조직위원회 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혜경, 이상화, 조은, 윤형숙, 김은실, 김현미, 조주현 교수님은 세계여성학대회와 아시아여성학회를 만드는데 함께 해주신 든든한 동지였지요.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대, 캐나다 오타와대, 인도 하이데라바드대에서 개최된 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은 모두 한국 대회가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또 그 어느 다른 나라, 다른 대학에서 그보다 더 멋진 대회를 개최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보고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김선욱 총장님 뜻으로 시작한 EGEP는 지난 5년 동안 새로운 도전으로서 이화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넓히고 지속적으로 많은 배움을 얻는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현재 99개국에서 2404명 신청자들이 지원하고 그 중 42개국 216명이 참가했습니다. 강의에 참여한 여성학자들은 18개국 47명이나 됩니다. 마침 10차 교육 참가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오픈 포럼에서 각국 참가자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오늘날 아시아‧아프리카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고 또 고통을 겪고 있는가 느낄 수 있었지요. 하지만 또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노력과 여성주의 활동가들의 지혜와 여성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성학 강의와 연구를 통해 형성한 질문과 분석이 축적되고, 아시아여성학센터와 한국여성연구원의 출판과 국제 교류 활동을 통해 한국여성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아시아 8개국 교과과정 개발 프로젝트를 비롯해 여성연구원과 센터가 발간한 책과 자료집이 100여 권이 넘습니다. 아시아여성학센터의 연구 사업, 교류 사업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 수십억 원에 달하는 해외 재단 연구비로 가능했습니다.

특히 작년부터 아시아여성학저널은 발간 20년을 넘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테일러 앤 프란시스, 루트리지 국제출판사와 협동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20년을 넘게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있는 저널이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시아여성학저널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감탄을 하는 것을 보며 이러한 일도 세계적으로 이화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자랑처럼 되어 죄송합니다만 그동안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신 보람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성학 운동하기

여성학 일이라면 구석구석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과 아낌없이 헌신을 해준 대학원 석‧박사생들, 조교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러한 일은 보통 빛이 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일들이었어요. 이들은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서 수많은 일을 해냈고, 여기서 이름을 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대학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큰 특권을 누린 저는 작은 월급으로 시민 사회에서 실무자로, 자원 활동가로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늘 빚진 마음을 가져왔습니다.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돌아보면 나의 재직 기간의 첫 부분은 여성학을 실험하고 정의하고 알리고 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학 초기에는 여성학운동이라는 말을 피부로 느끼는 시기였습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까지는 전국 대학 여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여성학을 자기 대학에서 개설하고 여성학 전공자 강사를 초빙할 수 있을까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저의 연구실 문턱이 닳을 정도였지요. 이들과의 상담 시간이 근무시간의 반 이상을 차지한 날도 여러 날이었습니다.

여성학 의식을 확산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 언제나 시간을 내서 다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였습니다. 전국 100여개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이들의 강사 초빙 청탁에 다 응할 수 없었습니다. 왕복 10시간도 넘는 대학에 출강하는 것을 여성학 전파를 위한 여성학 운동으로 생각한 여성학 석사들은 한 학기가 끝나면 녹초가 되어 보약을 먹어야 할 정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90년대 이후 학번에게 여성학이 전파되었고, 이 근처의 학번들은 여성학의 세례를 받았을 거라고들 하네요.

여성학을 처음 시작했던 시기는 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론 자유가 제한되고 왜곡 보도가 심한 80년대에는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느라 애썼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일 우스운 일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세계 언론의 관심이 서울로 집중되면서 미국의 메이저 방송사에서 인터뷰하자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 배정이 2분이라고 해서 어떻게 여성학을 2분에 소개하느냐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만큼 언론의 힘을 몰랐던 시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군사독재 시절을 살았던 60∼70년대 학번들에게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부에서 일한다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고 말한다면 그 세대 전체의 얘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 특히 여성들 대다수에게는 적용되는 것입니다. 정치 참여의 중요성,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관심이 싹튼 것은 민주 정부가 자리 잡기 시작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정책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국민의 정부에서 출발했고 저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에 관여하게 되면서 행정부가 움직이는 방법, 국회, 관련 시민사회와 관계 등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여성학은 인간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 가치지향적인 학문입니다. 그리고 또 여성학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실천에 기여하는 학문입니다. 여기에는 기존 질서와 현실에 비판적인 분석과 대안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여성학 전공자들은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가부장제적 사회와 학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예리한 날을 갈아가면서, 동시에 실천적 학문으로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큰일을 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변화를 촉구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반발을 사는 경우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박수와 칭찬은 잠깐이고 질타는 많이 받는 등 여성학 전공자들은 때때로 여전히 소수자이며 주변적인 위치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면서, 허탈감, 섭섭함, 소외감을 가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생명, 사회, 정의를 위한 여성학

“여성이 평등한 주체가 되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냐” “그래서 여성학, 여성주의는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데?”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제 자신 스스로도 늘 생각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회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문제라고 얘기해왔습니다. 생명, 사회, 정의를 위한 여성학은 바로 제가 생각하는 대안적 사회의 바탕입니다. 제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학부 여성학 계열 핵심교양과목 중 하나로 개설된 ‘생명, 사회, 정의’라는 이름의 수업을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생명과 정의와 페미니즘을 연결시키는 공부는 우리가 익숙해진 단선적 시간 개념과 경쟁적 구조의 사회적 공간 개념을 다른 긴 호흡으로 볼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동안 자연, 생명이라는 주제를 다룬 경우가 많지 않아서 동양, 서양 사상적 배경을 다루느라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학은 인간, 사회 조직과 가치관, 생산관계의 분업 등 다차원적인 영역의 연구를 해야 접근할 수 있는 문제로서 이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출발하는데, 거기에 더해 자연과 생명, 생태계라는 차원을 통합하면서 그 스케일과 복잡성이 달라지며 인식 범위가 대폭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한편으로는 지진, 홍수, 해일 등 대형 자연재해가 여성에게 더 혹심한 고통과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 경험 연구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원자로 폭발, 핵폭탄 위협, 방사선 노출은 어린이와 여성에게 성인 남성에 비해 몇십 배까지 이르는 피해를 가져온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분단 상황과 전쟁의 위협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여성들에게는 직‧간접적으로, 장기적으로 매우 불리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분단과 휴전 상태가 유지시켜온 군사문화는 남성성이 군대 조직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기업 조직의 기본 원리로 작용하게 하고 여기에서 여성들은 국방비 예산을 비롯해 군사정책에 대해 개입하는 것을 금기시 되고 이를 정당화하는 구조적 틀이 되기도 합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보통 경제라고 하면 화폐 경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것이 사실은 경제 활동입니다. 경제적 자립은 여성들에게, 기혼여성, 비혼여성, 싱글맘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기존의 노동시장 판에 끼어들어 여성들이 더 많은 리더십과 권한을 갖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판을 짜는 것도 중요합니다. 노동으로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돌봄과 살림을 경제 영역에서 가시화시키는 것, 이를 위해서는 경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바라보고 장기적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경쟁하고 강탈하는 경제가 아니라 서로 나누고 생명을 가진 경제, 일상에 뿌리내린 삶을 위한 경제로의 전환과 확장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과 구조로서 가부장제를 고민해왔습니다.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유일한 돌봄의 책임자로서 자연의 질서로서 여성을 옭매어 왔습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여성에게 요구된 역할과 일을 수행함에도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왔습니다.

요즈음은 페미니즘이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과 이유는 많지만 그 중 하나가 모성에 대한 입장과 언급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이론 안에서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모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여성의 운명, 사회적 지위는 신체적, 생물학으로 결정된다는 본질주의적 믿음을 비판하는 힘이 강한 반면, 모성의 가치와 그 복잡한 형태에 대한 분석은 거의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현재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에서처럼 한국의 저출산 현상은 핵가족 안에서 수행되는 어머니 역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가지로 웅변하는 것입니다. 저출산 현상은 대부분 부모가 될 세대에게 출생과 육아는 개인적 비용을 엄청나게 요구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비용은 보육, 교육 등 육아와 양육에 관련된 비용뿐만 아니라 출산과 육아가 발생시키는 자기발전과 취업, 승진의 기회가 제한되는 기회비용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장기적 시각에서 볼 때, 현재와 같은 남녀 임금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육아를 전적으로 떠맡은 여성과 부양의 책임을 지는 남성이라는 성별분업은 가부장적 성별관계를 어린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학습시킴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체계를 유지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게 합니다.

그런데 모성 이데올로기라는 가부장제의 억압적 이념으로 인해 모성이라는 가치마저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모성 자체가 문제일까요?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두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성은 특정 성의 책임과 의무가 아닙니다. ‘또하나의 문화’ 동인지에는 육아, 양육교육에 대한 관심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공동육아를 실천하고 제도화를 모색하는 등의 노력을 보여 왔습니다.

모성은 육체적이고 영적이고 지성적인 차원을 포함합니다.

모성에 접근하는 것은 자연, 몸, 재생산 관련 테크놀로지 등 또 다른 차원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또한 모성의 현 사회적 위치가 모계사회가 부계사회, 부권사회로 전환된 이유에 대한 물음을 묻게 합니다. 가부장제 사회가 모성보다 부성을 중시하게 된 과정과 그 이후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으로 인해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묻게 합니다.

저는 이제 남은 시간동안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씩 생각하고 깊이 다가가려고 합니다. 지난 30년간 여성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서론’을 쓰는 여자로 살았다면, 이제 우리 여성들의 힘의 원천, 생명의 사회에 대해서 보다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화 사랑 46년

최근 인터뷰했던 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그 동안 언제, 왜, 무엇이 제일 어려웠고, 절망스러웠냐고. 인간적인 관심을 가져준 고마운 질문인데 그 때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좌절의 경험은 참 많았던 것 같아요. 주로 이론적으로 구성해 낸 소망사항이 현실이라고 착각했다가 그 착각이 깨질 때가 좌절을 가져온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그 논리 전개는 이렇습니다.

1. 이화가 여성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2. 이화는 그 전통과 경험을 심화시켜 여성학을 만들어낸 학교다. 3. 그러므로 ‘이화는 여성주의적 학교다’라는 삼단논법을 혼자 만들어내고 그 전제를 믿고 기대어 일하다가, 그것만이 아닌 현실에 부딪혔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보면 저만의 평범한 착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여성주의적 학교여야 한다는 규범적 당위성과 아직 거기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 때문에 때론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2000년부터 이화는 여성지성공동체라고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성교육을 집중하는 여자대학이 여성지성공동체라고 표현하는 것은 동어 반복이기도 한 당연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화여대에 입학한지 46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화는 여성주의적 학교다”라는 소망과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화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대학 중 하나입니다. 이화는 조선 왕조시기에도 존재했고 일제 강점기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이화는 남북 분단 이전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화는 통일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 준비를 더 잘 하는 대학이 되어 한반도가 풀어야 할 평화공존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화를 사랑하는 학생, 졸업생, 교직원, 동창, 국제재단 등 세계의 친구들이 많습니다. 오랜 여성교육의 역사 전통을 배경으로 크게 성장한 이화가 미래에 수행할 더욱 광대하고 심오한 과업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있는 많은 국내외 친구들이 이화의 가장 소중하고 큰 자산입니다.

만일 누군가 여성교육의 내용과 방법과 목표와 기준이 이제까지 남성 중심 이론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것과 차이가 없어야 된다는 주장을 하신다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간주하는 사회에서 여성교육의 미션이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근거는 매우 미약합니다. 법제도나 통계적으로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할 근거는 없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가부장제의 전통을 벗어나서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을 내면화하려면 아직도 세월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미래를 탄탄히 준비하기 위해 여성교육이 더 향상되어야 한다는 점은 스웨덴의 세계적인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 교수도 지적했습니다.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 것”이라는 그의 얘기가 참 인상적이었지요.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여성교육은 여성학을 기초로 할 때 더 발전하고 강화될 수 있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이화여대의 미션은 여성교육이고 그 미션에 대한 신뢰와 헌신적 마음을 보이는 구성원의 비율은 매우 높으리라 여전히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화가 여성학에 기초한 여성교육의 전반적 내용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여성학적 접근을 하고 제도화해왔습니다. 여성신학, 여성철학, 여성문학, 여성사, 젠더법학, 성인지의학, 여성심리학, 디자인, 음악, 무용, 예술 등등 여러 영역에서 연구가 축적돼 왔습니다. 최근 이화리더십개발원에서 진행한 국제 STEM 분야 대학원생 세미나에서도 여성학이 필요함을 확인되었습니다. 생명의 가치, 정의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학의 토대 위에 새로운 학문, 연구, 교육 체계를 만들어감으로써 우리 사회와 글로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화의 여성학 운동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과 소중한 경험을 나눠준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생명과 사랑과 정의의 여성학을 위하여. 샬롬!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