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성역할 허문 화법

가부장제 불합리 드러내고

‘사이다’ 명언에 여성들 열광

‘남초예능’ 홍수 속에서

‘여성연대’ 포맷 살아남을까

 

개그우먼 김숙이 부조리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미러링한 가모장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다. ⓒMBC 황금어장 캡쳐
개그우먼 김숙이 부조리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미러링한 가모장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다. ⓒMBC 황금어장 캡쳐

‘가부장을 미러링(mirroring)한 ‘가모장’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우먼 김숙에 대한 여성학적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발언들은 부조리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에 억압당했던 여성들의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존재이면서 한국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의 신념과 새로운 감성을 대변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평가다.

“어디 남자가 건방지게” “남자가 조신하니 살림 좀 해야지”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어” “집안에 남자 잘 들여야 한다더니” 여성들이 열광하는 김숙의 발언들은 이런 식이다. 한국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고 들어야 했던 말들을 거울에 반사하는 것처럼 남성들에게 되갚아준다.

김숙은 1995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방송계에 첫 발을 내밀었다. 이후 20년 넘게 수많은 방송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우러를 만한 스타를 뜻하는 ‘god’이 이름 앞에 붙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김숙은 갓숙(god+김숙) 외에도 ‘퓨리오숙’ ‘가모장숙’ ‘숙크러쉬’로도 불린다. 퓨리오숙은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질주’ 속에서 여성 연대를 통해 독재자를 처단하는 퓨리오사를 빗댄 말이고, 숙크러시는 걸크러시(Girl Crush·여성이 다른 여성의 매력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별칭들은 모두 ‘가모장’ 캐릭터의 호감과 인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김숙은 한국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고 들어야 했던 말들을 거울에 반사하는 것처럼 남성들에게 되갚아준다. ⓒJTBC 님과함께2-최고의 사랑 캡쳐
김숙은 한국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고 들어야 했던 말들을 거울에 반사하는 것처럼 남성들에게 되갚아준다. ⓒJTBC 님과함께2-최고의 사랑 캡쳐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비롯해 ‘님과 함께2-최고의 사랑’(JTBC) 등 여러 방송을 통해 기존 성역할을 허물고 가부장제의 불합리를 드러내며 그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김숙 현상’을 페미니즘 맥락에서 분석하는 이들도 많다.

최근 발간된 『여/성이론』(여이연) 여름호는 ‘개그/우먼/미디어’를 주제로 기획특집을 마련해 미디어 현장의 ‘남남 연대’와 ‘남초 프로그램’의 지배력 앞에서 거의 퇴출 위기에 놓였던 김숙이 급속도록 얻게 된 ‘대박 인기’의 배경이 무엇인지 논한다.

손희정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은 ‘젠더전과 퓨리오-숙들의 탄생: 2016년, 파퓰러 페미니즘에 대한 소고’이라는 글에서 파퓰러 페미니즘(popular feminism)의 틀, 즉 대중문화의 대중성이나 통속성 안에서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탐구해온 흐름 속에서 김숙을 조명한다. 손 연구원은 “김숙이 미러링하는 것은 정확하게 한국의 가부장제”라며 “‘퓨리오숙’이야말로 보편적 가부장제와 한국의 특수성이 결합된 특수한 가부장제에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 전사들에 대한 징후적 별칭”이라고 말한다.

심혜경 천안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개그/우먼/미디어:김숙이라는 현상’이라는 글에서 김숙의 이름 ‘맑을 숙(淑)’에 주목한다. 그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매우 흔한 한국 여성의 이름이자 ‘요조숙녀’ 같은 단어에서 풍겨 나오듯이 맑고, 착하고, 아름답고, 단아한 현모양처가 되기를 기원하며 딸에게 지어주던 이름, ‘숙’. 그러니 한국 여성 일반을 지시한다 해도 무리랄 것 없다”면서 ‘김숙’이라는 이름이 “2016년 한국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의 신념과 새로운 감성을 대변하고 있는 현상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김숙과 윤정수가 쇼윈도우 부부로 출연한 ‘님과 함께2-최고의 사랑’(JTBC)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를 미러링한 가모장 캐릭터가 탄생했다. ⓒJTBC 님과함께2-최고의 사랑 캡쳐
김숙과 윤정수가 쇼윈도우 부부로 출연한 ‘님과 함께2-최고의 사랑’(JTBC)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를 미러링한 가모장 캐릭터가 탄생했다. ⓒJTBC 님과함께2-최고의 사랑 캡쳐

김숙의 인기는 선배이자 ‘절친’인 송은이와 함께 만든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에서 비롯됐다. ‘남초 예능’의 홍수 속에서 개그우먼들은 설자리를 찾지 못했고 데뷔 20년을 넘은 김숙도 출연할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김숙이 대중을 만나기 위해 선택한 것이 팟캐스트다. 2015년 4월 송은이와 함께 사재를 털어 만든 팟캐스트는 시작과 동시에 큰 인기를 누린다. 그해 11월에는 팟캐스트 포맷 그대로 SBS 러브FM ‘송은이, 김숙의 언니네 라디오’로 지상파 라디오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심 프로그래머는 “특유의 ‘또라이’와 ‘4차원’성을 통해 이분법적 위계질서로서의 가부장제 젠더를 역전시키면서 여성성도 남성성도 모두 다 가진 혹은 이를 교란하는 여성 주도형 캐릭터를 만들어”낸 김숙이 “웃음을 주는 여성이 미디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사회적, 물적 기반을 만들어내는 현상이 되었다”고 본다.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여성 연대 포맷과 시스템을 고민하게 하는 다음 단계로 미디어의 흐름을 전환시켰다는 평가다. “아무리 바빠도 ‘비밀보장’을 1순위로 빼놓는다”는 그의 인터뷰는 송은이와 함께 보여준 ‘여성 연대 미디어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 프로그래머는 “김숙은 여성 해방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와 진지함, 숭고미나 전통, 투쟁의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역전시키는 페미니즘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있지는 않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젠더 시스템을 뒤흔드는 김숙의 말솜씨는 “2016년 한국을 살아내는 대중문화 엔터테이너의 유연한 페미니스트 전략임에는 분명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섣불리 희망을 말하기엔 이르다. “김숙이 흐트러트려 놓은 젠더성과 앞으로 개그와 우먼, 미디어를 둘러싼 페미니즘의 대중 담론이 미디어 시스템에서 어떻게 전개되느냐”의 기로에 서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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