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의 기록 ④

민우회, 20일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열어

“일상화된 차별·폭력·혐오...이젠 바꾸자”

“‘아라비안 나이트’가 될걸?” 정말 그랬다. 살면서 겪은 여성 차별·폭력·혐오의 경험을 나누는 말하기대회가 열리자, 순식간에 백여 명이 모였다.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20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서울 신촌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의 열기는 뜨거웠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이제 여성혐오가 담론이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줬다. ‘살아남은’ 여성들의 분노는 뿌리가 깊다. ‘여자라서’ 겪은 일상화된 폭력에 대한 고백은 이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현장에서, 온라인 생중계로 이를 지켜본 이들은 공감과 분노, 연대와 지지를 표했다. 용기 있게 입을 연 참가자들의 발언을 기록해 정리했다.

 

20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유플렉스 앞 광장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주최의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시민들이 한 참가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20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유플렉스 앞 광장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주최의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시민들이 한 참가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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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남성 참가자 1) “지난 3월 18일 대학원 개강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입생들이 각각 장기자랑을 했는데, 한 여학생은 걸그룹 노래를 틀어 놓고 수많은 대학원생들 앞에서 섹시댄스를 췄어요. 대학원생들이 문자 그대로 환장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폭력입니다. ‘이게 뭐가 폭력이지? 자기가 좋아서 한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강압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성들의 눈요깃거리로 여기는 무형의 폭력이 은연중에 존재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남성성’을 강요하는 폭력에 심하게 노출돼 있고 그게 너무 싫습니다. 여성에게 좋은 것은 남성에게도 좋습니다. 여성해방,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력합시다. 

  

► (남성 참가자 2) “강남역 분향소에서 한 남성이 붙였다는 포스트잇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앞으로 여자들을 잘 보호하겠다’. 이 일이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지키지 못해 발생한 일일까요?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 해결될까요?

우리는 누군가를 보호할 때, 보호 대상이 나보다 약하고 힘없는 대상이라고 상정합니다. 보호자와 보호 대상 간에는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있습니다. 그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여성들은 여성의 본분을 지키지 않는다’. ‘한국여성은 김치녀’. 남성들은 이런 식으로 여성을 나누고 배제하고 악마로 만들어버립니다. 여성을 사람으로 보기는 합니까? 김치, 구멍, 맛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이번 일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성으로서 부당하게 많은 권력을 갖고, 여성들에게 요구를 하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술에 취해 차 안에서 졸면서 집에 가다가도 누가 내 몰카를 찍지는 않을까, 만지지 않을까 두려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동성집단에서 여성 혐오와 폭력이 만연하는 순간에도 침묵하곤 했습니다. 배제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남성은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기반해 있고 여성을 비인간화했는지, 집단에서 배제되기 싫다고 이 문제를 방치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성이 스스로 변하거나 다른 남성들을 변화시킬 때 우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남성 참가자 3) “오늘 문득 헤어진 여자 친구가 보고 싶어진 거예요. 그 친구가 있는 강의실 밖, 잘 안 보이는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문득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얘가 나와서 내 얼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자가 만나주지 않아’ 황산을 뿌리고, 토막 살인을 저질렀다는 뉴스들이 넘쳐나요. 그걸 보고 듣고 자란 여자가 헤어진 남자친구의 이런 모습을 보면 공포스러웠겠구나.

많은 남자들이 ‘잠정적 가해자’라는 말을 엄청나게 불쾌해해요. 근데 그게 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별 게 아닌데도 여성들에게 공포를 조장할 수 있어요. 이걸 모든 남성들이 깨달았으면 해요.

우리는 일본에 말하죠. ‘독일은 이렇게 반성하는데 너희는 왜 하지 않느냐’고. 근데 우리는 왜 반성하지 않을까요? 여성을 죽인 건 아니지만 방조해 온 게 아닐까요? 내가 인식하든 못했든 사회에서 권력을 향유해 왔고, 그래서 아무 피해 없이 살아온 게 아닐까요? 이 자리에 서기 전까지 침묵을 계속하려 했고, 방조했다는 것에 사과드리고 싶어요.”

 

► “2004년 유영철이 22명의 여성을 죽였을 때, 언론은 피해자 대부분이 성매매 여성이었음에 집중했습니다. ‘주부들이 보도방에 많이 나간다. 가정이 무너져서 사회가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몰아갔죠. 며칠 뒤 보도방 여성을 상대로 연쇄 성폭력을 저지른 범죄자가 검거됐어요. 그 남성은 ‘유영철 사건 보도를 보고 우리나라 주부들이 이렇게 타락했다는 걸 알았다. 화가 나서 노래방 도우미를 상대로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죠. 사람들이 가해자의 변명에 반응했고, 그 결과 아주 구체적인 폭력이 일어난 겁니다.

IMF 이후 남자들의 불안 심리가 여성에게 향했다고 하죠? 그런데 IMF 이후 3년간 여성 30만 명이 먼저 해고됐습니다. 여성 대부분이 비정규직이 됐고, 남녀 임금 격차가 큰 수준으로 벌어졌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남성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연민을 만들어왔죠. 아무도 여성에게는 공감하길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여성혐오 범죄가 일어나도, 바로 다음 날부터 ‘그게 왜 여성혐오 범죄냐’ ‘왜 특별한 애도를 표해야 하냐’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게 계속될 것이고, 그 반응의 주기가 점점 짧아질 거라고 봅니다. 아주 위험한 신호죠.

정말 기대하고 있는 건, 남자들에 의한 ‘문화를 바꾸겠다’는 선언과 운동입니다. 한국에선 이런 게 일어난 적이 없어요. 중요한 건 ‘왜 나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해?‘가 아니라, 그렇게 취급받지 않기 위해서 뭔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서 ‘날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너희들 탓이야’ 라고들 합니다. 남자분들, 그 담론에 휩쓸리지 마세요. 유령사회에 살고 있지 않잖아요. 죽은 여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남자들에게는 쉽게 동일시하면서, 왜 그 반대는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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