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의 기록 ②

민우회, 20일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열어

“일상화된 차별·폭력·혐오...이젠 바꾸자”

“‘아라비안 나이트’가 될 걸?” 정말 그랬다. 살면서 겪은 여성 차별·폭력·혐오의 경험을 나누는 말하기대회가 열리자, 순식간에 백여 명이 모였다.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20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서울 신촌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의 열기는 뜨거웠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이제 여성혐오가 담론이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줬다. ‘살아남은’ 여성들의 분노는 뿌리가 깊다. ‘여자라서’ 겪은 일상화된 폭력에 대한 고백은 이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현장에서, 온라인 생중계로 이를 지켜본 이들은 공감과 분노, 연대와 지지를 표했다. 용기 있게 입을 연 참가자들의 발언을 기록했다.

 

20일 오후부터 서울 신촌 거리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20일 오후부터 서울 신촌 거리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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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지은 기자

 

► “저는 아동성폭력 피해 생존자입니다. (...)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죠. 자궁을 ‘아기집’이라고, 너는 엄마가 될 몸이라고. 그런데 그런 몸을 일찍 버렸고 신고도 못 했죠.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싹 씻고, 긴팔 긴 바지로 갈아입었어요. 팔다리에 있는 멍을 가리려고. 아빠 얼굴을 똑바로 못 봤고…. 

저는 골반과 가슴이 남들보다 일찍 발달했는데 그게 진짜 싫었어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게 미웠고, ‘아가씨가 다 됐네, 시집가도 되겠다’는 말도 싫었어요. 중학교 땐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했어요. 중3 때까진 더운 여름에도 긴 바지만 입었어요. 결국 뭐예요? 피해자인 제 자신을 학대한 거잖아요. 8살짜리 아이가 집에 빨리 오라는 엄마의 말에 외진 지름길을 택한 게 잘못인가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내가 클 때쯤이면 세상이 날 보호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숱한 여성혐오와 차별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희망을 말해도 될까? 그때도 신고조차 하지 못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지금까지도 아직도 제 자신에 대해 완전히 괜찮다고 말해줄 자신이 없고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던져지는 여성혐오 발언에 큰 상처를 받기도 했고, 강남역 사건 등 여성 살인사건 보도될 때마다 같이 죽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자 아무나 만나고 다니면 안 된다’는 어른들 말에 맞장구를 친 적도 있었어요. 저는 이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거든요. 모든 여성은 ‘여성이라서’ 범죄에 노출돼 있어요. 

지금은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남들의 시선 때문에 친구들과 늦게까지 노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예쁜 치마, 빨간 입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범죄에 대한 허락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피해자로서 동정과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생존자로서 행복해지고 싶어요. 얼마 전 취직도 했고요.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싶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에 쏟아지는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일상적인지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아직도 많은 피해자가 있어요. 여성혐오에 무심하고 지켜만 보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여성혐오에 동참한 거라고밖에 볼 수 없죠. 제가 인터넷 게시판에 (성폭력 피해 경험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이런 댓글이 달렸어요. ‘그러니까 왜 어두운 길로 다니셨어요.’ 어두운 길을 걸어도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싶어요. 

 

► “저는 택시를 탈 때마다 너무 무서워요. 탈 때마다 빌어요. 이 사람이 범죄자가 아니기를. 사람들은 그렇게 무서우면 택시를 타지 말라고 해요. 그런데 왜 제가 제 돈 내고 타는 택시를 안심하고 못 타야 하죠? 

자취하는데 배달 음식을 좋아해요. 시킬 때마다 무서워요. 내가 시켜 놓고 왔는데 내가 놀라. 누군가가 문을 열고 마음만 먹으면 나를 제압하고 해할 수 있어요. 아무리 조심해도 그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피할 수 없는 거예요. 집도 위험해요. 집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소라넷 문제를 다룬 TV 프로그램을 같이 보던 오빠가 무섭다며 껐어요. 근데 오빠는 그거 꺼 버리면 그만이잖아. 여성들은 공포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강남역 살인사건 관련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니까, 남자들은 여자친구를 태그하면서 ‘조심해’, 여자들은 친구들 태그하면서 ‘우리 강남 가지 말자’라고 하더라고요. 왜 여자가 강남 가면 안 돼요? 저 강남 살아요! 저는 여자고요, 강남역에 계속 갈 거예요. 밤늦게 돌아다니고, 택시도 탈 거예요. 저는 제가 하는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범죄자들은 사이코가 아니라 문제를 방관하도록 길러진 사회의 산물이에요. 언제 어디든 있어요.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범죄는 피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저는 공포 때문에 제 말과 행동을 제압당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여자고, 사람이에요.”

 

 

지난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수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한지 나흘째인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모가 가득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수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한지 나흘째인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모가 가득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고등학생 참가자)

“오늘 선생님이 ‘남자들은 원래 덜렁거리니까 여자들이 이해하고 챙겨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밤늦게 다니지 마라’.... 여자애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억압하는 교육 아닌가요?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 여자 친구들이 생리한다고 당당하게 말을 못 해요. 야 그거 있어? 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죠. 근데 부끄러울 일이 아니잖아요? 여자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 (또 다른 고등학생 참가자)

“이 자리를 빌려서 우리 청소년들이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고 알리고 싶어요. 며칠 전 수학 여행을 다녀왔는데, 가기 전에 선생님이 여학생들에게 ‘성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자애들이 야한 옷차림을 하고 오지 않아야 한다. 남학생들의 성적 욕구를 자극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남학생들에게는 ‘너희는 여자애들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말씀은 하나도 안 하셨죠. 

또 50대 남성 선생님이 수업 중 과자를 모두에게 한 번씩 만져보게 하시더니, ‘너네 이거 먹어볼 사람? 다른 애들이 다 만진 거 먹어볼 사람?’ 하고 물어보셨어요. 아무도 손을 안 드니까 ‘다들 봤지? 너네 여자애들 몸을 함부로 굴리면 이렇게 된다.’ 이런 성차별적이고 위압적인 교육이 이어져 온 거예요.” 

 

►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동네 병원의 의사에게, 대학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지하철에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액땜했다고 생각해’라고 해요. 그런데 살면서 액땜만 하고 있어요! 최근에 그 의사를 고소했습니다. 털어 보니 상습범이었어요. 왜 다들 그동안 조용히 있었을까? 이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얼마 뒤 지하철에서 비슷한 일을 당해서 신고했는데 가해자가 대학교수더라고요. 부자고 자서전도 쓴 사람들이었어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해서 그랬다? 아니에요. 여자라서, 만만해서 그러는 거예요. 

이건 내 일이고, 내 친구의 일이고 내 엄마의 일이고, 남성들의 일이기도 해요. 여성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우리 모두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에서 살아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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