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애 여성학자 특강
‘일어나라, 탄실 김명순’
에드거 앨런 포 최초 소개
보들레르 ‘악의꽃’ 번역
창작집 낸 첫 여성 작가
데이트 강간 희생양으로
남자들의 제물이 되다
근대 문학사에 복원시켜야
“신여성을 공부하다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인 김명순(1896∼1951년?)을 만났어요. 그런데 여성 국문학자들이 그를 ‘연애 지상주의자’ ‘탕녀’로 표현하더군요. 어떻게 작가에게 이런 ‘레테르’(평가·낙인)를 붙일 수 있는지 의아했어요. 김명순에 대한 논문을 세 편 쓴 후 2016년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어요. 올해가 탄생 120주년이거든요.”
여성학자인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는 4월 28일 서울 역삼동 라움아트센터에서 열린 윈문화포럼 창립 4주년 기념특강 연사로 초청돼 이같이 말했다. 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최하는 윈문화포럼은 여성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모임으로 격월로 명사들을 초청해 포럼을 열고 있다.
김 전 교수는 “김명순의 삶이 너무 슬퍼서 씻김굿을 해주고 싶었다”며 특강 주제를 ‘일어나라, 탄실 김명순’이라고 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씻김굿 현장에 말러 제2교향곡 5악장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싶다고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선율의 ‘부활 교향곡’으로 김명순을 오늘 다시 되살려내고 싶다는 것이다.
김명순 작가의 얼굴 사진, “세상은 나를 ‘나쁜 피’라 불렀다”는 제하의 여성신문 카드뉴스, 그가 남긴 시 등이 담긴 슬라이드가 차례대로 펼쳐졌다. 김명순은 창작집 『생명의 과실』(1925) 『애인의 선물』(1929년?) 등 두 권을 남겼고 시와 소설, 희곡, 번역, 수필 등을 모두 합해 170여 편을 남겼다. 특히 『생명의 과실』은 우리나라 여성 작가가 쓴 최초의 창작집이다. 또 『창조』의 유일한 여성 동인이었고, ‘매일신보’에 입사해 기자로도 활동했다.
김명순의 삶과 문학세계는 여성신문 2016년 1월 14일자(1373호)에 보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 전 교수는 당시 기고문에서 “김명순은 데이트 강간의 희생양”이라며 “김명순을 기억하는 일은 그의 작품을 온당하게 평가하고 문학사에 제대로 위치 지우는 일일뿐 아니라 가부장제가 한 여성에게 가한 가혹한 처벌의 부당함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썼다.
김명순은 1896년 ‘조선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에서 기생 출신의 첩과 부호 사이에서 서녀로 태어났다. 김 전 교수는 “김명순은 기생의 딸로 나쁜 피를 안고 태어났다는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렸다”며 “자식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던 ‘종모법’ 탓에 김명순은 평생 정숙한 여자가 돼야 한다는 트라우마에 갇혀 살았다”고 말했다.
김명순과 함께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문인이자 승려인 김일엽도 올해 탄생 120주년을 맞았다. 신여성들은 교육은 받을 만큼 받지만 독립적인 경제력은 갖추지 못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들의 비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그 뿌리가 있다.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꾸리지 못하니 남자들에게 생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김명순 역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김명순의 문학적 역량은 대단했다. 에드거 앨런 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그는 니카라과의 국민 시인 루벤 다리오의 시를 인용했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번역, 발표했다. 김 전 교수는 “고전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을 작품 속에 빈번히 인용하고 서구의 문학 작품도 다수 인용할 만큼 뛰어난 지적 편력을 보였다”고 평했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춘 그는 독일 문화에 심취해 독일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비극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서울에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 도쿄의 국정여학교에 다니던 김명순은 열아홉 살 때 데이트 강간을 당한다. 김명순이 피해자인데도 ‘기생의 딸’이라는 출생과 결합하면서 가부장제 사회는 그에게 ‘헤픈 여자’라는 레테르를 덮어 씌었다. 언론의 2차 가해에 이어 고향 선배인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은 사회적 폭력의 정점이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인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광복 후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냅니다. 그는 이응준을 싫어하면서도 그 남자의 아내가 돼야 할 것 같은 양가감정을 느껴요. 김명순의 집안에서 이응준에게 혼인을 권하지만 거절당하는 일도 겪게 되지요.” 김 전 교수가 “예전만 해도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가해자와 결혼하는 일이 흔하지 않았느냐”라고 되묻자 포럼 회원들 사이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김명순은 평생 정식으로 결혼해서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남편 많은 처녀”(‘매일신보’의 동료 남자기자들) “피임법을 알려는 독신주의자”(잡지 『개벽』)로 부르며 성희롱하고 조롱했다. 평생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일본의 어느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정확한 사망 시기도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도 가부장제 문화가 남아 있는 한국에서 비혼 여성들이 편견과 폭력에 시달리는데 한 세기 전에는 오죽했으랴.
조선은 여성에게 사나운 곳이었다. 소설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소설가 김동인부터 초기 사회주의자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평론가 김기진, 아동권리 운동가인 방정환, 박애주의자 목사로 유명한 전영택까지 근대 최고의 지식인들은 여성해방과 자유주의의 기치를 든 김명순을 무절제하고 방탕한 성적 조롱의 대상으로 난도질했다.
김명순은 1917년 11월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월간잡지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3등으로 입선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20년대 언론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작품을 발표했을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한 마디로 1920년대는 ‘김명순 시대’였다. 그의 문학은 자신의 상처와 피해 의식을 ‘대항 서사’로 써내려간 대항 문학이었다. ‘고백체’의 자전적 글쓰기 외에 항일 정신이 또렷한 작품도 남겼다. 하지만 한국 문학계에서 그는 잊혀진 존재였다. 김 전 교수는 “‘김명순 문학’을 근대 문학사에 복원해 객관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