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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만 인천여성, 운동 주체로 만들겠다

지역여성들과 함께 하는 여성운동가들이 늘고 있다. 지역 현안을 해결

하는 주체는 이제 여성이어야 하며 지역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으로 여성운동의 방향은 전환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 깊숙히 뿌리 내

리고 가부장제적 질서와 싸우면서 지역사회를 재편하는데 온 몸을 던

지는 운동가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지역여성운동이 얻고 싶은 것은 여성이 주체가 되어 만든 성평등한

지역사회이다. 문제는 그 비전의 성취방법과 과정이다. 이것이 불분명

하다면 그 비전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말 것이다. ”

박인혜(43) 인천여성의전화 회장은 요즘 지역여성운동의 비전을 구체

화할 조직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는 “상담사업 이외에 지역여성들의 일상적인 삶과 욕구를 반영하

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지역조사와 욕구조사”를 벌이는 것이 가

장 우선 과제임을 강조한다.

인천 여성의 현실을 생각할 때 박인혜 회장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현실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인천여성의전화가 1백만 인천 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 중심조직으로서

받돋움하는 데에는 회원들과 함께 박인혜 회장의 정열이 녹아 들어가

있다.

인천시 학생상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2년부터 인천여성

의전화 회장인 현재까지 지역 활동가 생활은 몇가지 원칙을 고수하지

않으면 지켜내기 힘든 생활이었다.

“지역 운동단체로서 신뢰를 쌓는다. 단 여성적 관점을 분명히 보여주

면서 한다.”

신념을 그대로 실행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박인혜 회장

은 회원들과 함께 온라인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지역여성들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는 작업에 몰두했다.

가장 큰 성과가 바로 정선호 사건이었다. 지난 4월 인천에서는 듣기

에도 보기에도 끔찍한 가정폭력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에 의해 죽지않

을만큼 난자당한 한 여성의 인권을 되찾아 주기 위해 박인혜 회장은

즉시 인터넷에 사건 경과를 올리고 수시로 업데이트를 했고, 한 편에

서는 서명과 모금운동을 병행했다. 인터넷과 거리 서명자 3만2천여명

의 서명지가 재판부에 전해졌고, 1백90명 27개 단체에서 보내온 1천1

백여만원이 피해 여성에게 전달되었다. 피해여성과 두 자녀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하고 다시 사회인으로 복귀할 때까지 따뜻한

쉼터의 자리를 내준 것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박인혜 회장은 사이버 공간 속 여성운동의 새로운 가능

성을 깨닫기도 했다. 네티즌들의 서명과 모금 행렬이 줄을 이어 하루

1천건 이상의 접속으로 시스템이 다운되기도 하는 등 정선호 사건에

보여준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남편의 폭력에 못이겨 우발적인 범죄를 저질러 형을 살고

나온 여성들은 여성의전화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 받게 하고 출감 후에

는 파티도 열어 준다.

박인혜 회장은 이런 식이다. 현장에서 여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도구

가 상담이지만 자칫 여성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화되는 것에 그치

고 마는 일은 이제 그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상처받은 여성들이 끝

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회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계

를 맺는 일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연대도 그는 삼간다. 하나의 이슈에 각종 시민단체들이 연

대해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인혜 회장은 달리 마음 먹

고 있다.

“이제는 단체들이 정확하게 목적을 갖고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

야 한다. 그래야 집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름만 걸어놓고 들러리

노릇하는 시간에 내부 역량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물론 이는 그동안의 경험에서 나온 발상이다. 주체도 못되면서 힘만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연대가 필요한 일은 주체가 되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많은 청소년들이 목숨을 잃었던 인현동 화재사건은 연대한 단체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인천여성의전화만 남아 인천지역 청소년 인권사업으

로 확산시키기도 했다.

현안에만 바글거리다가 흩어지고 마는 지역운동이 아니라 유가족들을

시민운동의 주체로 탈바꿈시키고 이들이 연대하여 건전한 지역조직으

로 성장하도록 뒷받침하는 자리에 박인혜 회장은 항상 서 있고자 했

다.

“지역여성들의 당면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인천의 경우 공공근로사

업을 통해 인천지역 여성들이 전국에서 가장 열악한 사회, 경제적 조

건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외면한 상담사업으로는 지역여

성들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없다. 지역여성들과 함께 할 수 없을 때

그 여성들과 연대하여 평등, 평화, 생명, 참여, 나눔, 돌봄의 새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여성운동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시의회 속기록을 분석해 행정과 입법차원에서 여성문제가 어떻게 다

루어졌나를 살펴보고 여성정책이 전무했던 황당함을 전하는 박인혜 회

장은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힘이 세력

화되어 있지 않으며,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을 써먹기만 했지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학교성교육운동, 가정폭력 추방운동, 정보화운동과 함께 동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로 전환해 지역여성들과의 만남을 좀더 활성화 할 계획을

밝히는 박인혜 회장은 지역여성리더십을 탄탄히 키워내는 것을 우선

목표로 잡고 있다.

박인혜 회장은 국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4학년때 긴급조치 9호 위반

으로 제적당하고 1년간 투옥, 졸업 후 출판사를 다니다 '김일성 전기

' 출간으로 또다시 투옥되었다. 온갖 여성문제를 만날 수 있었던 감옥

안에서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나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내 정체성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

하다’는 것이 평소 생활 신조.

1985년∼1992년 도서출판 형성사 대표, 1993년 인천여성의전화 준비

위원회 준비위원, 1997년∼1999년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부회장을 역임

하고 작년부터 인천여성의전화 회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지역운동센

터장으로 활동 중이다.

'박정 희경 기자 chkyu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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