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4·19의 교훈」

희생자 어머니 심정 대변

안타까운 모성 등 

어머니의 솔직한 마음 드러내

 

최정희 작가.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최정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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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엄마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슬퍼하지 말어. 여고에 다니는 딸아이가 내가 보고 있는 신문을 보고 있다가 한 말이었다. 나는 말없이 딸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을 뿐이었다. 그날(19일) 그렇게 온통 다 일어날 줄을 전혀 모르고, 늘 나가는 다방에 나갔더니 천지가 떠나갈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들었던 핸드백을 동댕일 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썩어서 넘어져 가려는 나라를 건지려고 나선 젊은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총부리를 겨누느냐 말이다.”(「4·19의 교훈」에서)

최정희(1906~1990) 작가의 수필 「4·19의 교훈」에 주목하게 되는 4월이다. 최정희는 당시 “185명이나 현장에서 쓰러져갔다”며 “일주년이 다 가도록 해논 일이 무엇이냐고, 자기들은 애국자도 영웅도 아니지만, 아들의 피가 헛되이 짓밟혀선 안 된다고 외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이라며 희생자 어머니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십년간을 홀로, 갖은 희생을 다 기울여 키워온 내 아들, 어디 가서 다시 찾아 볼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은 그 개나리 진달래만이 4월을 장식한다”던 한 어머니의 하소연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나라의 부패상을 바로잡고자 나선 고대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데모와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참하여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한 어른들의 무능함을 반성한다.

1937년 「흉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최정희는 「지맥」(1939), 「인맥」(1940), 「천맥」(1941)으로 고난의 역경을 겪는 신여성들의 꿈과 그 현실적 한계를 다뤄 작가로 자리 잡았다. 「풍류 잡히는 마을」(1947) 이후 발표한 『인간사』(1960~1964)는 일제하에서 6·25를 거쳐 4·19 당시까지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조명했다. 1958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4년 제1회 여류문학상, 1971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을 받았다.

최정희는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 그는 영화감독 김유영과 혼인신고도 못 한 채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제2차 카프 검거사건에 연루돼 전주감옥에 갇히면서 어린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아픔을 겪었다. 더욱이 남편과 사별한 후 살기가 어려워 시댁에 아들을 맡겨야 했고, 그나마 시인 김동환과 동거하면서부터는 두 딸까지 낳아 기르느라 아들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정희는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성을, 아들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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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는 남편의 납북에 이어 아들마저 입대하자 살아만 오라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머니이기도 했다. 다행히 아들이 전쟁터에서 귀환했고 휴전 이후에는 함께 살며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내게는 직장을 가진 놈과 여고에 다니는 딸과 여중에 다니는 막내둥이 이렇게 셋이 있다.…힘에 부치는 그들의 요구임에 틀림없지만 어느 것의 요구거나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들의 시중을 드는 것도 한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어머니는 적막한 것」에서)면서 어머니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최정희는 강한 어머니이기 전에 자존감을 지키려는 여성작가였다. 일제강점기 전주사건 이후 친일작가활동을 했고 김동환의 납북 후 부역 혐의로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강하게 살아남아 문단계의 대모 역할까지 했다. 최정희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하였다. “즐겁지 않은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좀 어떻게 해서 좀 어떻게 잘 살 도리를 해 보라고 하지마는, 좀 어떻게 해서 좀 어떻게 잘 살 도리를 하기보다는 이대로 사는 것이 즐겁다면 이대로 살 밖에 없는 것이다. 가난하고 평탄치 못한 길을 걸어오면서……나를 구원할 자는……나 자신임을 안 것뿐”이라고.

시대의 아픔을 겪는 동안 여성 자신의 삶보다 어머니로서 또 작가로서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던 최정희. 그에게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다시 보는 듯해 서글프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만은 잃지 않기 위해 붓을 놓지 않은 작가 정신이 고맙기도 하다.

최정희 작가 연보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4남매 중 맏딸. 숙명여고보를 거쳐 중앙보육학교 졸업 후 경남 함안유치원 보모로 근무했다. 1930년 일본 동경의 미카와유치원 보모로 일하면서 유치진, 김동원 등과 함께 학생극예술좌에 참가했다. 이때 김유영과 만나 아들을 낳고 1931년 귀국해 김동환이 운영하던 삼천리사에서 근무했다. 1934년 전주사건(KAPF 2차 검거) 때 수감생활을 했으며, 1935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경기도 덕소에서 김동환과 농촌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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