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전 광양으로 시집가

호미 같은 손으로

매화 심고 가꿔

매년 120만명 다녀가는

대표 봄 축제로 일구다

 

맨손으로 돌산을 농원으로 일군 홍쌍리씨는 입버릇처럼 ‘매화는 내 딸이요, 매실은 내 아들이라’고 말했다. 아픈 남편 대신 홀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그에게 위안과 복을 가져다 준 매화나무는 자식만큼 소중할 수 밖에 없었다.
맨손으로 돌산을 농원으로 일군 홍쌍리씨는 입버릇처럼 ‘매화는 내 딸이요, 매실은 내 아들이라’고 말했다. 아픈 남편 대신 홀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그에게 위안과 복을 가져다 준 매화나무는 자식만큼 소중할 수 밖에 없었다.

섬진강은 봄의 강이다. 매해 봄마다 섬진강 물길 맞닿은 전남 광양 다압면은 눈보다 하얀 매화꽃으로 뒤덮인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답게 매화는 3월 중순 꽃망울을 터트려 벚꽃이 필 무렵 꽃비를 뿌린다. 이 꽃을 보기 위해 올해에만 123만명이 다녀갔다. 광양 매화축제의 주 무대는 청매실농원이다. 17만m²(6만평) 규모의 너른 땅에 10만 그루가 넘는 매화나무에서 피는 농원은 그야말로 ‘꽃대궐’을 이룬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농원은 손을 호미삼아 일궈낸 홍쌍리(73)씨의 땀과 눈물이 서려있다. 밤나무 가득했던 거친 돌산에 매화나무를 심고 매실로 전통식품명인으로 이름을 올리기까지 52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외로움에 심기 시작한 매화나무

축제가 끝이 나고 매화도 자취를 감춘 농원을 찾았다. 서울에서 5시간을 달려 도착한 농원에는 떨어진 꽃에 아쉬워하는 상춘객들만 보일 뿐, 홍씨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와 처음 대면한 곳은 농원에서 차로 3분가량 떨어진 밭이었다. 허리를 구부려 일하던 늙은 아낙들 사이에서 한창 김을 매던 그는 기자를 발견하곤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걸어 나왔다. 장갑을 다리가 탈탈 턴 후 철퍼덕 땅바닥에 앉은 그는 고로쇠물을 대접에 가득 따라 건넸다. “촌사람 이야기 뭐 들을 게 있다꼬.”

경남 밀양이 고향인 홍씨는 스물셋의 나이에 이곳 섬진강변 ‘밤골’로 시집왔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작은 아버지 가게일을 돕던 그를 눈여겨 본 시아버지 김오천(1988년 작고)옹이 자신의 아들과 중매를 섰다. 부산 깍쟁이였던 그에게 처음 하는 농사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화병을 얻어 33년을 누워있게 되면서 그는 빚쟁이들에 쫓기면서 세 아이를 돌보고 농사일까지 도맡아야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흙과 바람과 꽃이었다.

“빚쟁이들이 달려들어 옷이 찢기고 머리가 뽑히고 몸에 멍들지 않은 날이 수도 없었던 기라. 45만평 땅도 다 날렸지. 빚쟁이들이 머리를 잡지 못하게 짧게 자르고 옷도 미제 스모바지에 야전점퍼만 입고 살았다. 그때 산비탈에서 일하다가 매화꽃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 이때 꽃잎들 속에서 ‘엄마, 울지 말고 나하고 살아’라는 목소리가 들린 기라.”

그때부터 홍씨는 김을 매다가 꽃에게 하소연을 했고, 다시 일하다가 하늘을 향해 욕을 했다. 시조를 읊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하면서 설움을 달랬다. “외로운 산비탈에 홀로 핀 백합화야. 니 신세나 내 신세나 와 이리 똑같노. 그렇지만 니는 니 향으로 산천을 다 보듬지만 나는 사람이 그리워서 몬살겠다.” 그때 지은 시에선 그가 감내해야 했던 괴로움과 외로움이 뚝뚝 묻어났다.

때로는 위안을, 때로는 행복을 가져다 준 매화나무는 자식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입버릇처럼 ‘매화는 내 딸이요, 매실은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때부터 그는 시아버지와 함께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밤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자”는 며느리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을 한 가마 팔면 쌀 두 세가마를 살 수 있었던 반면, 매화나무는 돈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며느리 사랑이 남달랐던 시아버지 설득에 성공하면서 ‘밤골’은 차차 ‘매화마을’로 거듭났다.

청매실농원을 ‘꽃대궐’로 안내한 또 다른 사람은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다. “저 산꼭대기에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서 도시 사람들 마음 찌꺼기 버리고 갈 수 있는 천국을 만들어 보라”는 법정스님의 권유에 그는 차곡차곡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손을 호미 삼아 돌산을 농원으로 일궜다.
손을 호미 삼아 돌산을 농원으로 일궜다.

사람 살리고 지역 일으킨 매실

매실이 익는 초여름이 되면 집집마다 매실청을 담고 매실액을 만들어먹는다. 청매실농원 중심에 있는 2500개 장독에서도 매실 농축액부터 장아찌, 절임, 된장, 고추장이 익어가고 있다. 홍씨는 매년 실한 매실들을 골라 하나하나 꼭지를 따서 설탕과 함께 켜켜이 담아서 시간에게 맡긴다. 그는 수십 년째 농약 대신 유기농법을 고집하고 있다. 그는 몸소 매실의 효능을 경험하면서 매실에 대한 확신이 깊어졌다. 30대 중반에 찾아온 류머티스 관절염을 매실액으로 이겨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굽어지지 않아 밥을 떠먹을 수도 없고, 혼자선 머리를 못 감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지. 대형병원에서 약도 지어 먹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의원의 소개로 반신반의로 매실 발효액을 먹기 시작했는데 2년 반 만에 류머티스 관절염이 싹 나았어.”

그는 큰 병을 겪으면서 “흙이 밥인 줄 알았고, 산천초목이 반찬인 줄 알았고 산에 흐르는 물이 숭늉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가 농약 대신 유기농법을 고집하는 것도 이러한 지론때문이다. 그는 그때부터 매실을 더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실제로 음식에 매실을 넣으면 식중독이나 배탈을 예방한다. 장 안에 나쁜 균의 번식을 억제해 장의 염증을 막고 소화도 돕는다.

홍씨는 “매실을 약으로만 사용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밥상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에 매실장아찌부터 매실고추장, 매실된장, 매실절임, 매실젤리, 매실초콜릿까지 30종이 넘는 매실식품을 개발했다. 그 이후 매실로는 최초로 ‘전통식품 지정’을 받았고 제조법 특허도 냈다.

사람을 살린 매실은 지역 경제도 일으켰다. 청매실농원은 연 평균 4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2008년엔 1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매실 농사는 매실산업특구로 지정된 광양을 중심으로 강 건너 하동과 구례까지 파급됐다. 특히 광양 지역은 3300여 농가에서 연간 1만1000여톤의 매실을 생산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1995년 홍씨가 처음 시작한 광양매화축제는 이제는 한 해 120만명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봄 축제로 성장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들이 못나가게 말려도 “일 못하면 내가 죽는다”며 어김없이 밭으로 향한다. “출근, 퇴근도 정년퇴직도 새벽도 밤중도 없는 이런 직장이 어딨어. 이 나이에 어디서 이렇게 일할 수 있겠어. 너무 행복하지.” 그는 “흙을 만지며 내가 쏟아내는 보석 같은 땀으로 도시민의 밥상을 약상으로 만들겠다”며 “머리에 서리꽃이 피든 얼굴에 주름이 지든 일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흙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직접 지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홍쌍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적으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직접 지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홍쌍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적으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매실농사 짓는 시인

밀양의 만석꾼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노래 잘하고 글쓰기 좋아했다. 하지만 “공부 시키면 큰일 난다”는 작명가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를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딸인데 아들 사주를 타고 났다”는 이유였다. ‘쌍리’라는 이름은 원래 ‘상리(相理)’였다. 넓은 세상에 서로서로 옳은 일을 하라는 좋은 뜻이었다. 하지만 면사무소 직원이 쌍둥이 쌍(雙)자를 쓰라고 권하는 바람에 상은 ‘쌍’으로 바뀌었단다. 홍씨는 “부지런하게 두 몫의 일을 하라는 이름 그대로 살게 됐다”며 웃어보였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적으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됐다. 먹을 것이 없어 울던 아이들에게 “욕하느니 차라리 노래가 낫지 않으냐”며 울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시를 썼다. 밭으로 향하는 그는 늘 오른 손엔 호미를, 왼손엔 카메라와 메모지, 볼펜을 든다. 농사일을 하며 마음이 가는 꽃을 카메라에 담고 입에서 나오는 시며, 노래를 적기 위해서다. 그동안 만든 작품들을 엮어 책을 냈고, 곧 가수 유열씨와 함께 만든 노래도 발표할 예정이다.

사람이 그리워 매화나무를 심었던 홍씨는 이제 매년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농원의 주인이 됐다. 농원 입장료로 5000원만 받아도 수십억을 벌 수 있지만 그는 사시사철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게 사람”이라며 “세상에서 가장 부자는 인간 울타리 백만장자”라고 했다. “그럼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 아니냐”는 기자의 말에 그는 “정말 그렇다”며 크게 웃었다.

맨손으로 돌산을 농원으로 일군 그는 스스로를 “인간 불도저”라고 했다. 산을 밀어 밭을 일궜으니 맞는 말이다. 50년 넘게 매실과 더불어 살아온 그는 청년들에게 “내 영혼을 불태우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하면 2등 밖에 못해. 배운 것에 나만의 양념을 치면 1등도 할 수 있지. 남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도전해봐. 인생에 파도도 치고 그걸 넘어봐야 재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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