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가 스코틀랜드를 지나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창 밖으로 보이는 양 한 마리를 보았다. 엔지니어가 말했다. “스코틀랜드 양은 검은 색이구나.”“아니야”라고 물리학자가 말했다. “엔지니어들은 언제나 덤벙거려. 우리는 다만 최소한 한 마리의 스코틀랜드 양은 검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그러자 수학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도 않아. 우리는 단지 스코틀랜드에는 최소한 한쪽 면이 검은 양이 최소한 한 마리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어.”

이 이야기는 그 동안 학문간의 폐쇄성을 지적하는 데 쓰여 왔다. 그리고 1959년 C.P.스노우가 ‘두 문화’를 거론했다. 즉 과학과 문학이 얼마나 서로 떨어져 있고 대화조차 하지 않은지가 수 십년이 지났다고 우려하는 강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사태는 좀 개선되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학제간’(Interdisciplinary)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긴 했으나 좀처럼 각자의 입장과 견해를 융합하거나 조화롭게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별로 성공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러한 지식의 편협적 맥락은 현재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세계에서 특별한 의식없이 대중화되고 있다. 디지털에 의해 집합되고 있는 지식이나 자료는 그것이 놀랄 만큼 방대하다는 점에서 마치 지식의 전적인 소유라는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디지털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들간의 교류를 통해 재분석되거나 재통합되지는 않는다. 그저 사용자가 찾아 들어간 지점에서 그 지점의 지식만을 보여줄 뿐이다. 유추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비판하는 일도 없다.

최근에 와서야 이를 지적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스벤 버커츠는 말한다. “순간적인 정보가 인간의 이해력과 비전을 좀먹고 있다”, “자료의 폭발로 이해력의 세계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전망과 정보가 사방으로 끝없이 확대되면서, 우리는 완벽한 하나의 그림을 짜맞출 가능성마저도 상실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정보를 관리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폭주하기만 하는 정보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인가를 정신차리고 물어야 한다. 그 정보를 해석해서 소화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정보 뒤에서 모든 의미는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전에는 지식간의 대화부재가 가시적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함께 있다는 오해된 인식 속에 대화 자체도 논의에서 소멸되고 있다는 이중부담까지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필요한 정보를 즉각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는 현실은 아무런 사고력도 훈련되지 않은 어린이를 거대한 자료창고에 쳐 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디지털 세계는 이미 그것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해 미국의 미디어 교육그룹은 연방통신위원회에 이런 의견을 전달했다.

‘4세에서 15세 어린이의 놀이터’ 같은 인터넷 웹사이트는 오로지 어린이들의 취향을 조사하기 위한 상업적 도구로 만들어지고 있다- 일대일의 대화는 쌍방향의 자유로운 통화가 아니라 오직 마케팅 도구로 전락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교육적 규제가 검토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생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직은 어디에서고 찾아보기 어렵다. 디지털 벤처기업의 돈벌기 이미지와 컴퓨터 하드웨어 기업의 마케팅 전술만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에 대한 과신과 흥분은 이 사회의 지적 기반만이 아니라 지식의 의미조차 와해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을 단지 정보라는 이름과 맞바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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