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세상은 나를 ‘나쁜 피’라 불렀다

세상은 나를 ‘나쁜 피’라 불렀다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은 왜 매장당했나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5개국어를 구사했고 예술가, 기자로도 활동했으며, 자유로운 연애와 여성 해방을 꿈꾼 ‘1세대 신여성’.

나 김명순은, 그러나 세상에서 잊혀졌다.

1896년 평양 출생. 아명은 ‘탄실(彈實)’. 평안남도 갑부인 아버지 덕에 비단옷만 입고 자랐다. 영특해서 학교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았다.

어머니는 기생 출신 첩이었다. 세상은 나를 ‘나쁜 피’라 불렀다.

“기생년의 딸” “쌍것의 새끼는 할 수 없어”

사람들은 나더러 기생이 되라고 했다. 애초에 정숙한 여자일 수 없는 몸이었다.

일고여덟살 때부터 하느님께 기도했다. 나를 죽여요. 내 죽음으로 어머니의 죄를 사해 주세요.

1910년, 조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만 전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의지할 곳 없는 가난뱅이가 됐다. 비참한 신세를 면할 길은 공부뿐이었다. 

어렵게 일본 유학을 떠났다. 도쿄에서 만난 일본군 소위 이응준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했다.

성폭력은 ‘정조를 뺏긴 죄’였다. 피해자들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떠안아야 했다. 

연못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못했다. 사람들은 “더러운 피는 어쩔 수 없다”고들 했다.

서러울수록 공부에 열중했다. 다른 처자가 다섯 자를 배우고 노는 동안, 나는 놀지 않고 열두 자를 배우고 생각하리라. 이 멸시와 수치로부터 멀리멀리 벗어나리라.

나처럼 세 차례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은 드물었다. 

근대 문학, 서양 음악과 영어, 불어, 독어도 공부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등 여러 작품을 번역해 소개했다.

1920년대, 나는 “조선 최초의 여성 작가”로 떠올랐다. 동인지 『창조』의 유일한 여성 동인이 됐고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이광수, 김동인 등 당대 문인들의 찬사 속에서 시, 소설, 희곡, 수필 등 수십 편의 작품을 썼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분노했고, 근대 지식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여성이라서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을, 참된 사랑이 잉태할 평화와 조화를 꿈꿨다.

하지만 조국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남성 지식인이나, 정실 핏줄을 타고난 여성이 할 일이었다.

내 작품은 진지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 핏줄과 연애사를 갖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강간당한 일도, 아이를 낳자 떠나버린 애인도 다 내 탓이라고 했다. 

“남편 많은 처녀” “불순 부정한 피”라며 나를 공개적으로 매도하고 멸시한 이들을 어찌 잊을까.

김기진, 김동인, 방정환, 전영택...

이 고통이 나만의 것이랴. 수천만 여성들이 한을 품고 죽었으리라. 

왜 남성들은 여성을 억압하고, 우리에 집어넣고, 세상일을 모르게 길러놓고는 욕하고 비웃는가. 

화려해야 할 소녀 시절, 능욕과 학대에 얼마나 아프게 울었던가.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재미나게 살 수 있다더니 관 속에 생매장된 듯한 고통뿐이다.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1927년 김명순은 또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자전적 소설 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에 대한 오해를 벗기려 애썼다.

1939년 김동인은 문란한 여성 이야기인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 모델이 김명순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친오빠처럼 지내던 김동인이었다. 

김명순은 크나큰 불명예와 충격을 안고 조선 사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1950년대 일본 도쿄에 움막을 짓고 양아들과 함께 비참하게 살다가 끝내 정신이상으로 도쿄 근교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20년 이상 치열하게 창작하며 노래를 지속했으나, 작가 김명순과 그의 노래로서의 문학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결국 그 노래는 밀어인 채로 남았다.” - 서울대학교 국문학 연구자 남은혜 씨

“문학사에서 김명순은 ‘탕녀’로 매도돼 잊혀지거나 애써 멀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근대를 살아간 한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김명순의 슬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가해자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김명순의 명복을 빈다.” -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

* 카드뉴스 본문은 여성신문 제1373호에 실린 ‘기획 / 탄생 120돌 맞은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 기사 (http://www.womennews.co.kr/news/90281)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김명순의 생애에 관한 내용은 고 김명순의 시, 소설, 수필 작품과 관련 논문 등을 참조해 기자가 1인칭 시점으로 각색했습니다. 

* 참고 자료 : 최혜실,『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생각의나무, 2000 

남은혜, 「김명순 문학 연구」(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8 

「김명순 문학 행위에 대한 연구－텍스트 확정과 대항담론 형상화 방식을 중심으로」, 세계한국어문학회, 2010

구성 = 이세아 기자 (saltnpepa@womennews.co.kr)

이미지 제작 = 박규영 웹디자이너 (pky789@wome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