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여성 문인으로
양과 질에서 탁월한 성과
주체적 개인의 자아 인식과
민족해방 인식 드러내
내면의 상처와 피해의식
대항 서사로 써내려간
대항 문학 ‘재조명’
‘여성 최초’라는 화려한 타이틀 뒤에 숨은 그의 삶은 비극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열아홉 살에 겪은 데이트 강간이 ‘기생의 딸’이라는 출생과 결합하면서 가부장제 사회는 피해자인 그에게 ‘헤픈 여자’라는 오명을 덮어 씌었다. 언론의 2차 가해에 이어 고향 선배인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은 사회적 폭력의 정점이었다. 남성 중심의 순결 이데올로기가 지적 매력이 넘쳤던 신여성을 가혹한 제물로 삼은 것이다.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1896∼1951년?)이 20일 탄생 120돌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그의 비극적 삶에 가려진 문학적 업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다소 빛바랜 그를 복원시켜 여성 문학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남성의 독법으로 그를 읽으면 스캔들에 집중해 문학 세계를 의도적으로 등한시하게 된다. 이런 남성의 독법을 버리고 여성의 시각으로 문단의 선구자 김명순을 재조명하자는 것이다.
밀어로 남은 노래
페미니스트 시인 문정희(한국시인협회 회장)는 “김명순은 1세대 여성 문인으로 양과 질에서 단언코 누구보다 탁월했다”고 상찬했다. 문 시인은 “대화체나 서술까지 집어넣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시를 발표해서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며 “특히 식민지시대 항일 정신이 굉장히 많이 발현된 작품이 많았다. 이는 이육사나 한용운, 신채호보다 시기가 더 앞선 것이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자아 인식과 항일 정신을 보여준 선구적 작가였다”고 말했다.
김명순은 창작집 『생명의 과실』(1925) 『애인의 선물』(1929년?) 두 권을 냈다는 점에서 나혜석, 김일엽과 차별화된다. 특히 『생명의 과실』은 우리나라 여성 작가가 쓴 최초의 창작집이다.
작품 수도 소설(23편) 외에 모두 합해 170여 편을 남겨 100여 편을 남긴 두 작가보다 단연 앞선다(고쳐 쓴 작품도 포함). 또 시와 소설, 희곡, 번역,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에드거 앨런 포를 최초로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김명순은 1917년 11월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월간잡지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3등으로 입선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광수가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한 바로 그해였다. 김명순은 1920년대 언론에 거의 매일이다시피 작품을 발표했을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여성 문학을 오래 연구해온 원로 학자인 서정자 전 초당대 부총장은 “한 마디로 1920년대는 ‘김명순 시대’였을 정도”라며 “온몸을 던져 이룬 근대 여성 문학이었다. 자신의 상처와 피해 의식을 ‘대항 서사’로 써내려간 대항 문학”이라고 말했다.
김명순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는 불안한 자아를 그리고 있다(소설 ‘칠면조’). 또 첩의 딸이라는 출생 콤플렉스 역시 이런 피해의식을 더 가중시켰다. 어머니의 나쁜 피(기생)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쁜 피’를 고발하고(장편 ‘외로운 사람들’), 가부장제 의식으로 모두가 비난하고 배제하는 사회에 홀로 문학으로 항거했다(장편 ‘탄실이와 주영이’).
여성 작가가 쓴 수필의 최고봉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창조』의 유일한 여성 동인이었고, 1925년 ‘매일신보’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했고, 이듬해에는 조선통신중학관에서 발행한 『조선시인선집』에 유일한 여성 작가로 작품을 실었다. 김명순의 소설은 나혜석과 달리 비평적인 시각을 가졌다기보다 문학 그 자체에 집중해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작품보다 문학성이나 감수성이 더 짙게 느껴진다. 서 전 부총장은 “그의 작품은 내면세계를 추적하고 탐구하는 심리 소설의 성격을 띤다”며 “소설이든 시든 내면을 늘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타자화한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내면을 비쳐보면서 상처 받고 비판하면서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 나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말했다.
특히 그의 시가 가진 힘은 많은 문인들의 경탄이 대상이 됐다. 문 시인은 “그의 글은 탄탄하다. 특히 몇몇 시편은 절규의 톤이 굉장히 생생하다”고 평했다. 사랑시라기보다 강렬한 절규의 톤으로 지금의 독자들이 읽어도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김명순은 전통적인 구습에 저항하는 페미니즘 작가로도 단연 두드러진다. 맹문재 시인은 그의 평론에서 “‘조로의 화몽’, ‘고혹’ ‘탄실의 초몽’ 등에서 보듯 자아 인식을 강하게 나타냈고 ‘유언’ ‘저주’ ‘유리관 속에’ 등은 여성해방 인식을 적극적으로 지향했다”고 했다. 맹 시인은 “김명순의 여성해방 인식은 기존의 봉건 질서를 극복하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남성들의 작품이 지배하던 시대에 등장한 여성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서 전 부총장은 특히 그의 수필을 우리나라 여성 작가가 쓴 수필 중 최고봉이라고 평했다. 대표작으로는 1918년 작 ‘XX언늬에게’(『여자계』, 1918)를 꼽았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벼락 맞은 나무에 자신을 비유하면서 내면을 솔직히 토로한 글로 너무나 아름다운 수필”이라고 상찬했다.
국문학 연구자 남은혜씨도 그의 자전적 글쓰기에 주목했다. 192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서 당시의 고백체 형식과 관련해 자기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자전적 글쓰기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남씨는 “김명순은 192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창작 활동을 했다. 외로움은 그의 문학 전반에서 반복되는 정서이자 문학을 이어온 동력”이라며 “그는 문학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김명순은 이를 ‘노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첩의 자식’ ‘연애 대장’이라는 낙인이 붙으면서 신여성의 사생활에 집중했을 뿐 김명순의 문학에 대해 진지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으로 힐링받고, 문학으로 구원받았으나 사람들은 신여성 김명순에게만 주목했다. 남씨는 “김명순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치열하게 창작하면서 노래를 지속했으나 작가 김명순과 그의 노래로서의 문학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며 “결국 그 노래는 밀어인 채로 남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저주’ 일부분
늙은 병사가 있어서
오래 싸웠는지라
온몸에 상처를 받고는 싸움이 싫어서
군기(軍器)를 호미와 괭이로 갈았었다.
그러나 밭고랑은 거세고
저주는 사나우니
씨를 뿌리고 김을 매어도
추수는 없었다.(중략)
사람들이 머리를 비틀었다
자나 깨나 싸움이 있을진대
사나 죽으나 똑같을 것이라고
사람마다 두 팔에 힘을 내뽑았다.
-‘싸흠’ 일부분
<김명순 작가 연보>
1896년: 1월 20일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 1리 출생
1902년: 평양 남산현학교 입학. 1년 반 만에 3학년 진급
1904년: 사창골 야소교학교 전학
1906년: 서울로 유학
1909년: 12월 진명여학교 보통과 2학년 입학
1910년: 아버지 김희경 갑작스럽게 별세
1913년: 9월 일본 유학
1915년: 이응준 소위에게 강간을 당하고, 결혼도 거절당함. 첫 번째 자살 시도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입학
1917년: 3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1917년: 11월 『청춘』에서 처음 시행한 ‘특별대현상’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 3등 당선
1918년: 두 번째 일본 유학. 음악 전공
1918년~1920년: 동경 여학생들이 발간한 잡지 『여자계』에 수필과 소설 게재
1920년: 『창조』의 동인 등극.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 동인으로 작품 발간
1922년: 귀국 후 『개벽』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1923년: 첫 희곡 작품 ‘어붓자식’ 발표
1924년: 2월 『폐허이후』 동인으로 참여
1924년: ‘조선일보’에 소설 세 편 연재. 그 중 ‘탄실이와 주영이’는 자전소설로 발표
1925년: 4월 첫 번째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발간
1925년: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조선의 세 번째 여성기자로 활동 시작
1926년: 조선의 문사 28인의 걸작을 모아 편찬한 『조선시인선집』에 유일한 여성 시인으로 참여
1927년: 1월 두 번째 자살시도
1928년 4월~1929년 5월: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 발간
1930년: 세 번째 일본 유학
1934년: 봄 ‘법정대학’ 불·영·독문과 청강
1934년: ‘동아일보’에서 시 작품 발표
1936년: 8월 귀국
1937년~1938년: 소년소설, 동화 발표
1938년: ‘해저문때’ ‘라엘’ ‘Favorite’ 발표
1950년대: 사망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