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순결 이데올로기

사로잡힌 조선 사회에

성폭력 피해 사실 알려진 후

되레 처벌의 대상으로

 

기생의 딸이라는 편견

더해져 헤픈 여자로, 

지적 지평 넓혀가는

모습에 건방진 여자로

 

잔인한 남성 중심 사회

명민한 그녀를 무너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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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김명순(아명 탄실)은 1917년 잡지『청춘』의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작품집 『생명의 과실』(1925년)과 『애인의 선물』(1928년)을 발간했고 소설 23편, 시 107편(고쳐 쓴 글 포함), 수필, 평론, 희곡과 번역시, 번역소설 등 방대한 양의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는 왜 한국 사회에서 잊혀졌나

그런데도 김명순은 편협한 시선으로 매도됐다. 우리는 대부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올해 탄생 120주년을 맞아 김명순을 기억하는 일은 그의 작품을 온당하게 평가하고 문학사에 제대로 위치 지우는 일일뿐 아니라 가부장제가 한 여성에게 가한 가혹한 처벌의 부당함에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 김명순이 태어난 1896년의 조선은 일본과 서구 열강으로부터 위협 당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가 전파되던 시기다. ‘조선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에서 기생 출신의 첩과 부호 사이에서 서녀로 태어난 것 자체가 그의 삶에 갈등을 잉태했다.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학교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가 첩인 자신의 어머니를 ‘악마’로 규정하는 것을 알게 됐고 어머니가 ‘회개’하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어머니가 첩살이를 그만두면 자신과는 같이 살 수 없게 되는 딜레마 속에 ‘악마’인 어머니와 거리 두기를 하면서 자신은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정숙한 여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정숙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른 여성들이 가지지 않은 자산을 더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평양 부호였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자신에게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아 김명순은 가난 속에서 진명여학교를 거쳐 일본유학을 감행했다. 도쿄에서 일본군 소위 이응준으로부터 데이트 중 강간을 당하였고 이 후 자살을 기도한 사실이 1915년 ‘매일신보’를 통해 공개됐다. 가부장적 순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폭력 피해자 김명순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데이트 강간을 당한 사실은 첩의 자식이라는 태생적인 ‘피’에 더해져 그의 일생을 옥죄었다.

김명순은 평생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트 강간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쿄의 국정여학교를 다니던 김명순은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채 조선으로 귀국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가서 서양음악을 공부했다. 1934년에는 세 번째로 일본으로 유학했다. 당시 그는 다시 프랑스나 독일로 유학하려고 프랑스 어학원에 다니고 상지(上智)대 독문과에서도 공부했다. 또 법정(法政)대 불문과, 영문과, 독문과에서 청강하기도 했다.

열 살도 되지 않아 평양을 떠나 서울로 유학한 것은 자신을 소실의 자식이라고 따돌림하는 가족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다. 김명순은 평양과 더 멀리 떨어진 도교로 유학했고 그보다 더 멀리 프랑스나 독일로 유학가기를 원했는데 유학을 통해 더 많은 지적 탐구를 하고자 할뿐 아니라 고향이나 조선을 떠나 더 멀리 가는 것 자체가 자신의 출신 성분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욕구를 드러내고 데이트 강간과 이로 인한 사회적 매도에 저항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에드거 앨런 포 국내에 첫 소개

작품을 통해 김명순의 지적 편력을 엿보면, 김명순은 고전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을 작품 속에 빈번히 인용하고 있고 서구의 문학 작품을 다수 인용한다. 김명순은 독일 문화와 작품에 심취해 스스로 독일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괴테의 ‘미이논(미뇽)의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랜다고 고백했고, 칸트와 헥켈(헤겔)등의 독일 철학자를 거명했다. 김명순은 안리(앙리) 포앙카레의 『만년의 사상』을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키고 인용했고, 니카라과의 국민 시인 루벤 다리오의 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철가면』, 영국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와 프랑스의 시인 벼르렌(폴 베를네느)의 전기를 언급하고 그 밖에 진화론의 다윈, 서유기의 손오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칸딘스티의 콤포지손(構想) 등을 언급해 김명순의 지적 관심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명순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과 보들레르를 비롯한 프랑스 시인의 시를 번역, 발표했다. 서구를 비롯한 세계의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과 신화를 탐독했고 철학과 사회 사상과 예술을 섭렵하면서 다방면의 지식을 축적했으며 이를 조선 사회에 소개했다. 더 나아가 쇼팽, 리스트, 슈만, 슈베르트, 바하, 브람스, 멘델스존, 베토벤의 음악 등 서양 음악에 정통한 피아니스트였다.

김명순은 공부를 통해 자신에게 드리워진 사회적 굴레를 벗어나고 일본을 이기기 위해 조선 사회와 민족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 했다. 또 여성이 정치 사회를 다스린다면 전쟁 보다는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 했음이 분명하다. 김명순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고향을 빛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조선 사회는 김명순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기생 출신 첩의 딸 김명순이 데이트에 응했다는 것만으로 ‘헤픈 여자’로 규정했고, 어머니와 같이 기생이 돼야 할 처지에 이를 거부하고 열심히 공부해 지적 지평을 넓혀가는 김명순을 ‘건방진 여자’로 규정하면서 근대 남성들은 아름답고 지적으로 뛰어난 김명순을 성적 희롱의 대상으로 깎아내렸다.

1921년 잡지 『개벽』은 “피임법을 알려는 독신주의자”라고 칭하며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이라고 거론했고, 작가 김기진은 ‘김명순에 대한 공개장’이라는 글을 1924년 잡지 『신여성』에 싣고 김명순은 기생 출신 소실인 어머니로부터 퇴폐적인 혈통을 이어받았고 순결을 잃었다면서 김명순을 무절제하고 방종하며 타락한 여자라고 공개적으로 매도했다.

남편 많은 처녀, 탕녀로 매도 당해

또 김기진은 일본 작가의 소설 ‘너희의 배후에서’에 등장하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여주인공이 김명순이라고 주장했다. 잡지 『별건곤』은 ‘은파리’에서 김명순을 두고 “남편을 다섯 번씩 갈고도 처녀시인”으로 행세한다고 매도했다(이 기사와 관련해 김명순은 발행인 차상찬과 필자 방정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연재물 ‘은파리’는 중단됐다).

1927년 김명순이 아이를 입양하자 잡지 『별건곤』은 김명순이 혼외자로 낳은 아기의 성을 무엇이라 붙여야 할지 몰라 애쓴다고 공개적으로 언어적 성폭력을 계속했다. 김명순은 1925년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을 때 동료 기자들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라고 수군거리면서 성희롱했다. 김명순이 강간당한지 20여년이 지난 1930년대에도 데이트 강간을 당한 사실은 계속 들추어졌다.

김명순은 자신의 고통이 자신 만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해 한을 품고 죽었고 희생됐을 것이라고 인식하고, 남자들이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우리에 집어넣고 세상일을 모르게 길러놓고 욕하고 비웃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지만 자기 홀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슬프다고 고백한다.

김명순은 1927년 두 번째로 자살 기도를 하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면서 시와 소설, 수필, 희곡 작품을 통해 자신에 대한 오해를 벗기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1925년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출판하면서 머리말에 “오해 밧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으로”이라 써서 세상에 내놓았고, 1928년 『애인의 선물』을 출간하고 희망을 꿈꾼다. 천주교에 다시 귀의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동향 출신이자 이복오빠의 친구로 친오빠처럼 따랐던 김동인이 1939년 방탕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김연실전』을 연재했는데, 이 주인공이 김명순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김명순은 영원히 조선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 후에도 김동인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처녀 과부”, “영업적 매녀 아닌 여인”이라고 매도했고, 전영택은 1950년대 도쿄 YMCA 뒷마당에서 움막을 짓고 양아들과 비참하게 살아가는 김명순을 보고 “변태적으로 살아가고 방종, 반항의 생활”을 했다고 비판했다. 김명순은 결국 정신이상으로 일본 도쿄 근교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사에서 김명순은 ‘탕녀’로 매도돼 잊혀지거나 애써 멀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근대를 살아간 한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김명순의 슬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가해자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김명순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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