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24주년 맞아
“피해자 동의‧용서 빠진 ‘졸속 합의’는 무효...끝까지 싸우겠다”
피해 할머니 238명 중 생존자는 이제 46명...시간이 없다
1992년 1월 8일 서울 종로 주한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거리에 섰다. 소녀 시절 일본군에 끌려가 잔인하게 유린당한 일을 증언하며 “후손들이 이런 피해를 또 겪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그를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쳐갔다. 빌딩 창문들은 굳게 닫힌 채였다. 정부도 침묵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가 말하는 첫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기억이다.
수요시위는 지난 6일 1212회를 돌파했다.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돼 24년간 이어져, 단일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바라던 사과와 보상은 아직 없다.
일본 정부는 수요시위 초기부터 피해자들의 증언을 부정하며 ‘피해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전쟁터로 따라나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여론도 싸늘했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들의 명예 회복을 지지하기보다, ‘부끄러운 여자’라며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많았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거리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국제 사회를 향해 아픔을 증언하고 진상 규명,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 노력을 촉구했다. 이들의 외침에 사회가 조금씩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3년 유엔의 법률기관인 국제법률위원회(ICT)는 일본 정부가 위안소를 설치하고 강제로 여성들을 모집해 성노예로 삼았음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특별조사관은 1996년 보고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성노예 제도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했다. 2007년엔 ‘위안부 결의안’이 미 하원을 통과했고, 2011년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행위는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시위를 이어가는 할머니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지난 12월 28일 한일 정부는 갑작스럽게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위안부 문제 타결을 선언했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아베 총리의 사죄와 반성 표명, 일본 정부 예산 10억엔(약 97억원)을 투입한 위안부 문제 관련 지원 재단 설립,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상호 비난‧비판 자제 등을 전제로 “최종적‧불가역적”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메시지에서 “한일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과 국민 여러분들께서 이해를 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은 협상 과정에서 배제됐다. 사과 내용도 과거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담화 등에서 진전된 게 없다는 평가가 많다. 평화의 소녀상 이전‧철거 논란도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대협은 이번 합의를 “굴욕적인 외교적 담합”이라며, “피해자와 시민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합의를 두고 정부가 최종 해결 확인을 한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이며, 피해자들을 다시 한 번 커다란 고통으로 내모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반발 여론이 거센데도 정부는 귀를 닫은 채 합의안 이행 준비에 나섰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지난 5일 야당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재협상 요구에 대해 “재협상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관련 성과는) 모두 피해자들이 직접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 눈치만 보면서 침묵하고 있다가, 2011년 헌재 위헌 결정 이후에야 외교 협상을 시작했지요. 이제 굴욕적인 합의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윤 대표는 6일 시위에서 “한일 협상을 백지화하고 원점에서 재협상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채인석 화성시장 등 수도권 지방자치단체장 32명도 이날 시위에 맞춰 ‘한일 위안부 협상 무효’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일 협상안이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제했고,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라는 핵심 조건이 빠졌다”며 정부에 재협상을 촉구했다.
정치인들의 연대발언도 이어졌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시위에서 “박근혜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지우개로 지우듯 고통을 잊으라고 한다”며 “제대로 된 책임 추궁과 진상 규명 없는 평화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고 질타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도 “위안부 졸속 합의는 박 대통령의 월권”이며 “2011년 헌재 위헌 판결 후에도 법적 책임을 확실히 하지 않고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를 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 14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일본 도쿄,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 전 세계 12개국 40여개 지역에서도 이날 연대 수요시위가 열렸다. 정대협은 “일본 정부가 수많은 아시아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성노예화하고 인권을 유린한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하고 반성하는 그날까지” 수요시위와 평화비 건립을 이어가겠다고 이날 선언했다.
시위는 계속되지만, 시간은 부족하다.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이제 46명뿐이다. 살아남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또다시 끝모를 투쟁을 다짐했다. 이용수(89) 할머니는 6일 시위에서 “제가 89세다. 운동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두 번 다시 후손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위안부 문제를) 절대로 해결하겠다”고 외쳤다. 김복동(90) 할머니도 지난 2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이 진실한 마음으로 사죄하고 당당히 배상하는 것”이라며 “다시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위안부’ 문제가 진정 해결되는 순간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