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그룹 동물원 창단 멤버 가수 김창기

1988년 동물원으로 데뷔‚ 7집 활동 후 탈퇴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꾸준히 음악 활동

“동물원 노래 ‘응팔’로 다시 살아나 감사”

 

‘거리에서’ ‘변해가네’ 등 그룹 동물원의 히트곡을 담당했던 창립 멤버 김창기씨.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거리에서’ ‘변해가네’ 등 그룹 동물원의 히트곡을 담당했던 창립 멤버 김창기씨.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누나 이거 누구 노래야? 캡 좋은데?”

“동물원이네. 딱 들으면 모르냐?”

동 시간대 시청률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덕선’과 남동생 ‘노을’이 듣고 있는 노래는 그룹 ‘동물원’의 ‘혜화동’.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라는 노랫말은 이웃사촌, 동네 친구, 골목 인심이 담긴 옛 추억과 향수를 되살린다. 따뜻한 정이 흐르는 드라마 응팔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까.

응팔이 불러낸 1988년은 동물원이 데뷔한 해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변해가네’ 등을 작사·작곡하며 동물원의 히트곡을 담당했던 창립 멤버 김창기(52)는 응팔을 통해 부활한 동물원 노래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을까. 그는 “실생활에서는 잘 못 느낀다”면서도 “중학생 딸이 학기말 고사가 끝나고 명동에 갔는데 ‘아빠 노래가 명동 전체를 도배하고 있어서 어깨에 힘 좀 줬다’고 하더라”며 미소 지었다.

“내가 노래하는 이유”

지난 14일 김창기씨와 마주한 곳은 그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김창기정신과의원’ 건물의 지하 공연장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김창기와 친구들’의 공연이 열리는 곳이자 연습실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는 7집 앨범을 끝으로 동물원에서 탈퇴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88년 동물원 1집으로 정식 데뷔한 그는 현재 정신과 의사이자 가수로 바쁘게 살고 있다. 방송을 하지 않고도 노래가 알려지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그 시절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널 사랑하겠어’ 등으로 뜨거웠던 그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동물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88년 1월에 데뷔한 동물원은 거의 동아리 활동 같은 친구들 모임이었다. 처음부터 가수를 계속할 생각은 아니었다. 1989년에 다 같이 졸업하고 취직했다.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쇼맨십까지 있었으면 당연히 계속했겠지만.(웃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딴따라’ 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고 그랬다. ‘취미처럼 재밌게 활동하고 일은 일대로 해야지’ 생각했다. 당시에는 레코드판 한 장당 100원씩 받았다. 그걸 일곱 명이 나눠 가지면 뭐가 남겠나. 저작권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냥 술 사주면 얻어먹는 재미로 노래하고 그랬다.”

-작곡 데뷔곡은 1987년 가수 임지훈이 부른 ‘사랑의 썰물’이다.

“‘차가운 너의 이별의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이 가사가 임지훈씨는 물론 내 인생도 바꿔놓았다. ‘사랑의 썰물’이 히트를 하자, 산울림의 김창완 형이 나를 찾았다. ‘만들어 놓은 노래가 더 있냐? 다 가져와 봐’ 하시기에 ‘제 친구들도 노래 잘 만들어요’ 했더니 ‘같이 가자’고 하셨다. 형은 나보다 11살 많다. 창완 형도 큰일로 생각하지 않고 시작한 일인데 터진 거다. 그래서 놀라시기도 하고. 재밌게 지냈다. 창완 형이 참 잘해주셨다.”

-의대 공부와 가수를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았나.

“별로 힘들 게 없는 것이, 우리는 텔레비전에 안 나갔다. 공연도 방학 때나 명절 때만 했다. 음반을 녹음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였다. 또 그때는 언더그라운드 개념이 있어서 ‘우리는 밖(방송)에 안 나간다’ ‘라디오도 꼭 가야 되나’ 그렇게 잘난 척하던 때였다. 잘난 척하느라 방송을 천박하게 봤다. 그땐 그런 흐름이 있었다.”

 

노래하는 의사 김창기씨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널 사랑하겠어’ 등 동물원의 대표곡을 만들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노래하는 의사 김창기씨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널 사랑하겠어’ 등 동물원의 대표곡을 만들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노래는 왜 만들게 됐나.

“어머니가 이대 영문과를 나오셨는데 원래는 이대 음대에다 원서를 집어넣었다가 외할아버지가 잡아끌어서 영문과로 바꾸신 거다. 식구들이 다 노래를 좋아한다. 형도 고대 경제학과에 다녔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음대 성악 교수를 하고 있다. 동생도 노래를 잘한다. 나만 노래를 못한다. ‘그럼 만들어볼까’ 해서 시작했다. 곡 만드는 게 제일 좋다.”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하나.

“노래 잘 못 한다. ‘노래 못한다’는 소리 많이 듣는다. ‘혜화동’ 그 노래도 음이 어쩜 그렇게 맞는 게 하나도 없는지…. 은근하게 미묘하게 조금씩 조금씩 틀린다.”

-음악은 김창기에게 어떤 의미인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첫 번째 가장 강렬한 이유는 내가 재회하고 싶은 사람이나 상황을 만나는 통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노래를 잘 만들고, 잘한다는 것을 인정받는 유능함을 확인하는 거다. 그다음엔 재미있게 노는 거. 나에게 음악은 이렇게 세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재회하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다. 지금 첫사랑 만나서 뭐하겠나. 게다가 지금 그렇게 애타는 사람이 있으면 큰일 난다.(웃음)”

-드라마 응팔과 동물원 노래가 정말 잘 어울린다.

“죽었던 노래가 살아났다.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고 싶다. 고맙다. 사실 동물원의 감성이 요즘 시대에는 안 통한다. 드라마 스토리의 힘이지 음악의 힘만은 아니지 않겠나. 이제는 그 감성이 낡은 것이니까…. 지금은 잘 만들어졌어도 서정적이거나 서사적인 노랫말이 알려지질 않는다. 좋은 노래들이 많은데 죽어가고 있다. 지금의 음악 구조, 방송 구조로는 좀 더 내면적인 이야기를 다룬 노랫말은 살아남기 힘들다.”

-추억을 부르는 가사 때문인지 ‘혜화동’이 특히 인기다.

“‘혜화동’은 1988년에 발표된 동물원 2집에 실려 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다음으로 싱글 릴리스 된 곡으로, 대단한 히트곡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비교적 잘 알려졌었다. 난 이제 반백의 아저씨가 됐지만‚ 꿈속에 등장하는 혜화동에서, 나는 늘 개구쟁이 어린아이고, 골목길은 여전히 넓은 축구장이며, 우리 친구들은 평생을 같이할 형제들이다.”

-요즘 라디오 진행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CBS ‘그대 창가에 김창기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말을 더듬어서 못 할 거 같았지만, 용기를 내서 하게 됐다. 재밌다. 라디오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언제나 라디오 DJ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청취자들이 좋은 곡을 신청해줄 때가 제일 좋다. 우리 프로그램은 10대부터 70대까지 듣는다. 어르신들은 편지와 사진도 보내신다. 아직까지는 반응이 괜찮다.(웃음) 내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처음에는 실수를 많이 했다. 피디랑 사인이 안 맞아서 침묵이 흐르기도 하고, 엉뚱한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적응됐다.”

 

김창기는 김창기정신과의원 원장이다. 그는 “상담하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창기는 김창기정신과의원 원장이다. 그는 “상담하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의사 선생님’ 김창기

김창기씨는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느냐”는 질문에 “나는 굉장히 잘 잊혀지는 얼굴”이라며 “예전에 아침방송을 6년 동안 매일 했는데 택시기사 아저씨가 ‘어디서 많이 봤는데…. EBS 강사 아니세요?’ 하더라”며 웃었다. ‘잘 잊히는’ 평범한 얼굴은 정신과 의사인 그에게 실보다는 득이 된다. 거리에서는 자유롭고, 환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친근한 얼굴이 된다. 김창기의 아내도 정신과 의사다. 두 사람은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반항적인 아이들과 만난다”는 그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관계와 양육에서 비롯되는 게 많다”고 말했다. ‘김창기 의사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그의 또 다른 인생을 들여다봤다.

-정신과 의사의 삶은 많이 힘들 것 같다.

“학교 안 가겠다는 아이들, 엄마를 때리는 아이들을 만난다. 그것을 맨몸으로 받아들이면 감당 못 하겠지만 가는 길을 아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수술하는 것과 똑같다.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내고, 들어가는 길을 알아낸다. 부분적 관찰자, 부분적 참여자가 돼서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원인을 알아낸다.”

-길을 찾는 방법이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잘살고 있는데 왜 이 아이는 어긋날까. 어떤 장애물 때문에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그로부터 발전하지 못하나. 이런 상황을 아이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한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동기를 찾는다. 대부분 부모님이 데리고 오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해드릴 수 없다. 난 용병이 아니니까. 그리고 대부분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방식이 옳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는 건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 부모와의 관계와 양육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절반이다.”

-아이들이 상처받는 이유는 뭔가.

“사실은 몇 년 전만 해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10%밖에 안 됐다. 지금은 다들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고, 교육의 과실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과도하게 집착을 해서 문제가 된다. 지나치게 불안한 부모는 아이의 특성을 알지 못한 채 주류로 가는 길로 ‘같이 가라’고 떠민다. 아이가 아이의 삶을 살게 해주자. 결국엔 민감성이다. 아이가 보내는 신호와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고 그걸 맞춰야 한다. 자꾸만 부모가 원하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끌고 가니 문제가 생긴다.”

김창기는 “머릿속에는 항상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물원을 떠나 학교 선배이자 같은 정신과 의사인 이범용과 1997년 ‘창고’를 결성해 앨범을 발표했다. 2000년에는 첫 솔로 앨범 ‘하강의 미학’을 발표했고, 13년 후에야 2집 ‘내 머리 속의 가시’를 만들었다. 9개월 만인 2014년에는 EP앨범 ‘평범한 남자의 유치한 노래’를 발표했다. 1997년부터 2014년까지 발표한 앨범은 연이어 반응을 얻지 못했다. “대중이 나의 노래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김창기는 노래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의사로 살며 한동안 좋았다. 그런데 아주 편안해져야 할 머릿속에서 가시가 하나 자라기 시작했다. 회피하고 있던, 정말 좋은 음악을 한 번만이라도 해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힘겹게 용기를 내었고, 음악을 그만둔 지 13년 만에 ‘내 머리 속의 가시’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처참한 실패를 하며, 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보지 않으려 했던 한계를 온몸으로 확인하고 나니까,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실패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아프기는 해도 견딜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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