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승무원 패소 판결,

‘여중생 임신’ 기획사 대표

대법원서 무죄 취지 파기환송

사법부 여성인권 시계

10년 전으로 후퇴

민주주의 최후 보루인

대법원 퇴행적 판결 ‘비판’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11월 27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을 마친 뒤 눈물을 보이며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11월 27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을 마친 뒤 눈물을 보이며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2015년 사법부의 성폭력 판결은 ‘무죄’가 트렌드다.”

최근 취재 현장에서 만난 인권변호사는 변호사들 사이에서 요즘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한 해를 보내며 송년호 제작 준비에 한창인 기자는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다. 기자를 우울하게 한 이유 중 하나가 시민의 상식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법부의 ‘나쁜 판결’이었다.

양육비, 재산분할 등 가족법 분야에선 진일보한 판결도 있었지만 여성인권 분야에선 10년 전으로 인권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 거셌다. “누구를 위한 사법부인지 모르겠다”는 분노가 여성계에서 나올 만큼 여성노동, 성폭력 관련 재판에서 퇴행적 판결이 나왔다. 나쁜 판결의 대표적 사례로 세 가지가 꼽힌다. 여성노동 분야에선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다 해고된 KTX 여승무원 34명이 7년여 동안 벌였던 법정 공방에서 결국 패소한 사건이다. 성폭력 분야에선 여중생을 임신시킨 40대 연예기획사 대표에 대한 무죄 판결이 대표적이다. 또 옛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이 ‘오빠, 이건 강간이야’라는 말에 성행위를 중단했다는 이유로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한 판결도 ‘나쁜 판결’로 비판을 받았다.

이 중 연예기획사 대표 무죄 판결은 전국 325개 여성‧청소년‧인권단체가 제대로 된 처벌을 촉구하는 10만 명 서명운동을 진행할 만큼 국민적 공분을 샀다. 피해자가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재판부가 사랑이라고 주장한 이상한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10만 명 서명운동에는 물론 남성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판결의 중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대법원이 있다. 대법원은 지난 2월 “코레일과 승무원 사이에 직접 근로관계가 성립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근로자 파견계약 관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1·2심과 달리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서울고등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이 판결은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모임으로부터 ‘올해의 걸림돌 판결’에 선정했다.

7년 소송 끝에 승무원들에게 남은 것은 8640만원의 빚 폭탄이었다. 지난 3월 소송에 참여한 박모씨가 세 살 난 딸에게 빚을 남기는 걸 미안해하면서 자살할 만큼 여성 노동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도 대법원은 사용자 입장의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성폭력 사건에선 대법원이 왜 자꾸 이렇게 국민 정서와 어긋나는 판결을 내놓는 걸까. 전문가들은 대법관들이 사회 통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꼬집었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는 “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니라 법률심을 하는 곳인데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무죄 판결을 보면 사실심처럼 세세한 사실 관계를 적시했다”며 의아해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도 “재판부가 성폭력 피해자의 강요된 순응은 외면한 것 같다”고 질타했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 즉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다.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 행위 자체가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데 법원은 피해자가 반항을 하지 못할 만큼 힘을 행사해야 유죄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10대 여학생이나 지적장애아는 사건을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다. 피해자의 나이나 지적 수준, 가해자와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진술에 일관성이 없거나 신빙성이 낮다는 이유로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김수정 민변 아동인권위원장은 “청소년의 ‘사랑한다’는 형식적 애정 표현에 집중해 강요, 폭행과 협박, 위계와 위력이 있었는지를 어른의 시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올해 청소년 성폭력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법원 판결이 잇따랐다”고 일침을 가했다.

법은 우리 삶의 준거 틀이 돼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에도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올 한 해 여성인권 판결에서 시민들의 상식에 어긋난 판결이 적잖았다. 새해에는 부디 사법부의 젠더의식이 높아져서 ‘나쁜 판결’이 사라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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