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단골로 쓰던 토지문화관 삼 층 끝 방에서는 선생님의 텃밭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매고 거두시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철이 난 것처럼 흙에서 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생명줄인지를 깨우쳐갔지요.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밭에 엎드려 김을 매고 있는 게 아니라 경배를 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땅에 대한 경배가 곧 농사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입으로 하는 직업적인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천성의 농사꾼이셨습니다. 사실, 땅이 거저 이자를 붙여줍니까. 인간의 피땀과 등골을 있는 대로 빼먹어야 거기 합당한 이자를 붙여주는 게 땅 아니던가요.’
2008년 6월 소설가 고(故) 박완서씨가 고 박경리 선생을 기리며 쓴 추모사의 일부다.
‘한국문학의 큰 산맥’으로 불리는 박경리 선생은 1926년 12월 2일(음력 10월 28일) 태어났다. 역사의 격동기를 통과한 그의 생은 평탄치 않았다. 한국전쟁 때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하나 남은 딸은 김지하 시인과 결혼해 옥바라지로 고역을 치렀다. 26년간 이어진 『토지』 집필 중 유방암 수술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아픔도 겪었다. 1973년 그가 쓴 『토지』 서문에는 고된 생을 반추하는 듯한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생의 한순간도 펜을 놓지 않았다. 19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첫 여성 현대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문학은 그의 외로움과 고통에 대한 위로이자, 노모와 어린 딸의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밥벌이’였다. 개인적 아픔을 승화한 『불신시대』, 『암흑시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에 이어 대표작 『토지』는 “한국 현대 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하나의 극점”으로 평가된다.
박경리 선생은 여성 작가들의 숨통을 틔워 준 ‘은인’이기도 하다. 그를 필두로 박완서, 오정희, 김향숙, 김지원, 김채원, 윤정모, 이경자, 최명희 등의 중견작가들이 활발히 활동했고,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여성주의 소설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박경리 선생은 1999년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에 토지문화관(http://www.tojicul.or.kr/)을 짓고 거주하며 작가들의 집필활동을 도왔다. 직접 작가 창작실을 마련해 후배 작가들이 공짜로 들어와 서너 달씩 살도록 했다. 은희경, 천운영, 윤성희 등 많은 여성작가들은 그의 단골손님이었다.
2007년 7월 폐에 종양이 발견됐지만, 그는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토지문학관에 머물렀다. 텃밭을 일구며 자연과 벗 삼아 지내던 그는 이듬해 봄 타계했다. 누구보다 이 땅의 사람과 생명을 사랑했던 그의 삶은 한 편의 시로 남았다. “사랑/가장 순수하고/밀도 짙은 연민이에요/연민//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설명없는 아픔//그것에 대해서/아파하는 마음이/가장 숭고한/사랑입니다//사랑이/우리에게 있다면/길러주는/사랑을 하세요” (‘생명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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