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올레길에서 만난 해녀 이야기 엮어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오랜만에 신작 펴내

 

대한민국 전역에 ‘올레 신드롬’을 일으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이정실 사진기자
대한민국 전역에 ‘올레 신드롬’을 일으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이정실 사진기자

‘길 내는 여자’ 서명숙(58) 제주 올레 이사장의 삶은 ‘걷기 전’과 ‘걷기 후’로 나뉜다.

걷기 전, 그는 하루하루 치열한 취재 현장을 누비는 열혈 정치부 기자였다. 무조건 일만 하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모르는, 몸과 마음을 다 일에 던지는, 몸을 돌아볼 시간이 없는, 바깥만 보고 사는 인생이었다. 여자가 드문 시사지 정치부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린 것은 물론이다.

편집국장을 지내며 현장은 멀어졌고, 책상 앞에 앉아 남의 글에 파묻히자 머리만 비대해지는 몸의 불균형을 경험하게 된다. 스트레스와 압박은 점점 심해졌고, 오후만 되면 편두통에 시달렸다. 서서히 지쳐갔고, 결국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23년 기자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나이 쉰이었다.

인생 2막은 ‘걷는 길’ 위에서 시작됐다. 사표를 던지고 가장 먼저 한 것은 홀로 칠레 산티아고 길 800㎞를 36일간 밟은 일이었다. 인생의 대청소 기간이었다. 30년간 묵힌 정신적인 때를 길 위에 내려놓고서야 행복을 맛보았다. 아침에 눈을 떠서 건강한 채로 걸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고, 아름답게 지는 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문득 고향 제주를 떠올렸다.

“네가 도로공사 직원이냐?”라며 강하게 반대하는 어머니의 만류를 뒤로하고 31년 만에 제주로 내려간 서명숙 이사장은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제주의 문화를 살리고, 대한민국 전역에 ‘올레 신드롬’을 일으킨 존재로 인정받지만, 당시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남동생만은 그의 뜻을 이해했다. “이건 제주도의 역사를 바꾸는 일이다”라는 동생의 말이 그를 이끌었다.

 

서명숙 이사장은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을 펴냈다. ⓒ이정실 사진기자
서명숙 이사장은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을 펴냈다. ⓒ이정실 사진기자

제주 올레길 정규 코스가 완성된 건 지난 2012년 11월이다. 2007년 9월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에서 출발한 1코스는 구좌읍 종달바당 21코스까지 이어졌다. 8년 동안 만든 길은 걷기여행 열풍을 불러왔다. 한국 최초로 사회적기업가의 최고 영예인 ‘아쇼카 펠로’에 선정되는 기쁨도 선물했다. 올레길이 그에게 준 선물은 또 있다. 얼마 전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북하우스)을 펴낸 이유도 그 선물 ‘해녀’ 때문이다.

기자직을 그만두면서 “앞으로 절대로 남의 이야기,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이야기는 쓰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이지만, 선물 같은 존재 ‘해녀’들을 만나면서 흔들렸다. 해녀들이 그에게 들려준 삶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제주 사람도 엄마나 친척이 해녀가 아닌 이상 해녀에 관해 잘 모른다”며 “해녀는 항상 피상적인 피사체였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제주 올레길에서 여성 여행객 피살 사건이 있었다. 길을 만든 사람으로서 유가족 다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일부 언론에서 올레길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왜 길을 냈을까’ 처음으로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때 해녀 대장이 해준 한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 고비만 넘기면 다 살게 된다는 의미다. 고비를 넘겨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4·3사건 등 역사의 고비를 거슬러 올라가 사회와 가정에서 수많은 질곡을 이겨낸 그분의 한마디가 갖는 무게를 알기에 울림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테왁 하나에 몸을 의지해 거친 파도를 상대하며 물질하는 해녀는 제주의 정체성이자 제주의 정신을 상징한다. 서 이사장은 지난 8년간 삶 자체로 감동을 주는 해녀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해녀를 100% 미화할 생각은 없다”며 “해녀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철저한 개인이면서도 따뜻한 공생의 덕을 나누는 해녀들의 모순적이면서도 강렬한 삶을 그의 언어로 충실하게 담아냈다.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은 해녀들의 당당하고 진실된 삶을 조명했다. ⓒ북하우스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은 해녀들의 당당하고 진실된 삶을 조명했다. ⓒ북하우스

그는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다는 기자에게 “역사 부분은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문화로서 해녀들의 독특한 문화를 21세기 여성들이 많이 배웠으면 한다는 게 이유였다. 해녀들은 공동체 안에서 깊게 의지하며 끈끈한 연대의식을 놓지 않는다. 실력에서는 철저한 평가를 내리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의리는 또 다르게 적용된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해녀들을 배려하기 위해, 얕은 바다의 물건은 건드리지 않고, 물질이 서툰 해녀에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잡은 수확물을 나눠주기도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의 정수!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젊은이와 늙은이도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걸 해녀들은 알았다. 자기 자신과는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동료 선후배끼리는 끈끈한 자매애를 발휘하는 해녀 사회 이 얼마나 인간적인 공동체인가.”

서 이사장은 현역으로 활동 중인 아흔두 살 최고령 해녀부터 풋풋한 20대 예비 해녀까지 수많은 해녀의 다채로운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해녀 문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2015년 ‘법환 해녀학교’ 1기생으로 해녀 교육을 수료했다. 해녀의 미래를 그려보는 동시에 나고 자란 제주의 바다를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이었다. 그는 오늘도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가슴속 조언을 따라 살고 있다. “제주 해녀들은 바람과 파도를 이겨내면서 더 강하고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살아 있으면서 여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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