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남자 키에 맞춘 싱크대 만들어야

부엌은 남자상위 시대로

남자의 키와 미숙함 배려해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작은 것 하나, 소소한 것 하나로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모른다. 집에서도 적지 않은 디테일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방은 한 자 차이로 쓸모가 달라진다. 온전한 한 평의 발코니가 생기면 아파트가 달라진다. 복도를 십센티만 넓히면 뭔가 중간중간 놓고 싶어진다.

그중 가장 중요한 디테일이 싱크대 높이다. 책상 높이, 의자 높이, 모니터 눈높이, TV 눈높이, 침대 높이도 하나하나 중요하지만 대개 개인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 싱크대란 온 가족이 쓰고 게다가 높이 조절이 불가능하니(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싱크대가 있지만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게 싱크대 높이다.

올봄에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싱크대 높이였다. 3년 전에 어쩌다 우리 가족에게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인 강화의 주말주택이다. 구석에 틀어박힌 부엌을 마루로 끌어내는 데에는 환영 일색이었는데, 싱크대와 작업대 높이에서 싸움이 붙은 것이다. 나보다 15㎝ 더 큰 남편은 “더 높여!”를 외쳤고, 남편보다도 훨씬 더 큰 남자친구를 데려와 요리를 해 먹곤 하는 나보다 키 큰 딸은 “왕창 높여!”를 부르짖었다.

솔직히 지난 3년 동안 나조차도 쓰기 싫은 부엌이었다. 들어가기 싫은 것은 물론이고 조금 일하다 보면 허리 아프고, 설겆이 하다 보면 사방에 물이 튀는지라 고역이었다. 그러니 남편은 오죽했으랴.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더 고역이었다. 알다시피 남자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 여자가 더 나서서 일하게 된다. ‘차라리 내가 힘들고 말지’라는 심리는 나 같은 여자에게조차 작용하는 것이다.

해도 너무했지, 어떻게 82㎝로 싱크대 6대를 만들어놨을까? 지은 지 그리 오래된 집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얼마로 올리지? 몇 달 동안 우리 가족은 각기 마음속에 줄자를 들고 다닌 것 같다. 다른 집들의 부엌은 물론 카페, 스탠딩 식당 등 가는 데마다 높이를 재며 팔을 올려 씻는 시늉, 써는 시늉, 반죽하는 시늉을 해봤다. 마지막 회의에서 나는 88㎝, 남편은 90~92㎝, 딸은 95㎝를 주장하다가 결국 남편이 오케이하는 쪽으로 결론을 봤다. 딸은 가끔 올 뿐이지만 남편은 주야장천 쓸 것 아닌가?

싱크대와 작업대를 높이고 나니 재미있는 장면이 속출한다. 나는 남편이 부엌에서 당연히 편할 것으로 여기고 하루 한 끼 책임지라고 거리낌없이 요구한다. 딸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완전 조용해지고 요리에만 몰두한다. 키 큰 친구들이 놀러오면 작업대 편하다고 부엌에서 놀려고 든다. 키 작은 친구들은 작업대가 가슴에 올라붙는다고 재밌어 한다. 이럴 때는 아주 쉬운 해결책이 있다. 굽이 있는 실내화를 내주면 되는 것이다.

싱크대를 높여라. 남자 키에 맞춘 싱크대가 옳다. 높으면 굽 달린 실내화를 신으면 되지만, 낮으면 허리를 구부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부엌은 남자상위 시대가 되는 것이 옳다. 남자의 키와 남자의 미숙함을 배려해주는 부엌의 디테일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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