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22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김영삼(YS) 전 대통령 빈소를 조문하면서 YH무역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김경숙 열사를 떠올렸다고 한다.

당시 YH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최 전 의원은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YH 사건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최선을 다해 여성 노동자들을 도와줬다. 나중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경숙이 묘지를 안장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이때도 김 총재가 묘지가 안장될 수 있도록 힘을 써줬다”고 회고했다. 또 신민당사에서 경숙이 추모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추모비를 만들려고 후원을 부탁하러 갔을 때도 100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YH 여성 노동자들에게 김영삼 이름 석 자는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야당 총재로 10·26 사태와 유신정권의 붕괴를 촉발한 YH무역 농성 사건을 지원하면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1979년 8월 9일 회사 측의 부당한 폐업 공고에 반대해 해고 위기에 처한 여성 노동자 187명이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해줬다. 최 전 의원의 회고.

“우리가 ‘여기서 나가라면 오갈 데가 없다’고 말하자 김 총재는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 여러분을 밑에서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식사 때마다 설렁탕이나 비빔밥 등을 시켜줬는데 200명 가까운 인원을 끼니마다 챙겨주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당시 노동청장에게 전화를 해서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고 독촉했으나 노동청장은 들은 척도 안 했고 직접 와보지도 않았다. 암울한 시대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공들을 격려하는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공들을 격려하는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경찰들이 밀착 감시하며 당사 주변을 에워싸다시피 하자 당시 YS는 경찰의 따귀를 올려붙이기도 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사흘 뒤인 11일 새벽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당사에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고 당직자와 의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YS는 처음에 YH 여성 노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제1야당에 경찰이 들어온 적이 없다. 설마 들어오겠느냐”고 안심시켰으나 결국 경찰은 난입했고, 스물한 살의 여공 김경숙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YS도 경찰에 강제로 끌려나와 상도동 자택으로 쫓겨갔다. 김경숙의 사망 사건이 벌어지자 YS는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고 진상 규명 백서를 발간하며 정권과 전면전을 벌였다.

최 전 의원은 “임신 말기에 끌려가서 조사받다 바로 구속돼 경숙이가 죽은 것도 몰랐다. 유치장에서야 알게 됐다. 출소 후 김 총재에게 인사를 갔더니 ‘고생했다’고 하더라. 아들을 낳았는데 손명순 사모님이 쌀과 미역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온 기억도 난다”며 “김 총재는 여성 노동자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결단력이 참 대단했다”고 했다.

YS의 민주화 투쟁에서 YH무역 농성 사건은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김영삼 총재는 “살인 정치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은 피를 보고 머지않아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라고 일갈했다. 박정희 정권은 YS를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YS는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새벽에 빗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두고두고 회자될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여성 정치인들은 YS의 소탈한 인간미를 전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낸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안동국시 좋아하셔서 청와대 오찬에서도 국수 드시던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박 의원은 “YS 대통령 때문에 앵커에서 잘리고 역설적으로 특파원으로도 다녀왔다”고 했다. 말단 서기에서 초대 민선 농협 회장에 오른 한호선씨가 검찰에 구속된 사건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표적 수사’라는 표현을 쓰자 이원종 당시 정무수석이 MBC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YS가 그 뉴스를 보고 진노하셨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앵커에서 물러나던 1995년 YS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이화여대 졸업식에 다녀왔는데 여성인력 창출이라는 의미에서 MBC가 그를 처음 여성 특파원으로 발령 낸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얘기다.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2011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YS를 예방했을 때 추억을 전했다. 당시 YS는 “반드시 당선되리라 믿는다”며 “인상이 좋고 누가 봐도 멋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므로 점수를 따고 들어갈 것이다. 외모가 상당히 중요하더라. 나도 과거에 유세가 끝나고 나면 따라다니는 사람이 엄청났다”고 격려해줬다고 한다.

박우민 재영 한인여성회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며 애도를 표했다. 그는 “한평생 정치를 하셨는데 그분이 믿는 민주주의를 위해 소신껏 행동하셨다고 생각한다”며 “영면하시기를 빈다”고 말했다.

야당 여성 지도자들의 YS 추모도 이어졌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YS의 죽음이 전해진 후 트위터를 통해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짊어진 고인에 대해 성급한 공과의 말은 큰 의미가 없다”며 “폭압적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크게 헌신한 것만으로도 고인은 온 국민의 애도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문민정부 시대를 연 YS를 애도하며 “YS, DJ라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고 공공연하게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지 않을 수 있던 시대였다”며 문민시대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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