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삶에도 “내 인생 재미있었다”

김경애가 만난 황무지의 들꽃, 고려인 여성 ④

 

소련 붕괴 이후 개척 주도한 여성들

무기력한 남성 대신해 허드렛일도

빈곤으로 이혼해도 자녀 부양은 여성 몫

 

한 키르키즈인 어린이가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애
한 키르키즈인 어린이가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애

이베로니카(51)씨는 현재 6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봉제공장 사장으로 성공한 기업인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자 15년간 다니던 봉제공장이 문을 닫게 됐고, 실직한 그녀는 봉제공장에서 수습, 봉제공, 디자이너 등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 집에서 옷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옷이 잘 팔려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점점 공장을 늘려오면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비슈케크에서 만난 고려인 여성 20명은 모두 취업 중이거나 오랜 동안 일한 끝에 은퇴한 상태였다. 고려인 여성들은 의학, 과학기술, 수학 등 소위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분야를 전공했고, 교사, 간호사 등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취업을 많이 하던 분야뿐만 아니라 의사, 치과의사, 건축설계사, 화물관리사, 공장 물품 조달자, 엔지니어,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고려인 남성들이 정신적·물질적 공황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여성들은 청소부 등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고려인 여성들은 중앙아시아 시장의 반찬가게를 개척해 주도하고 있다. 여성들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헤쳐나가는 주역이 된 것이다. 장엘리아나(64)씨는 지리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대학에서 측량기사로 일했으나 소련 붕괴로 실직했다. 하지만 무기력한 남편과는 달리 청소일,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며 딸을 홀로 키웠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은 스탈린 시대다. 인터뷰 대상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레닌이 주창했던 것처럼 여성의 동등한 노동권을 주창하고 임금노동에 참여해야 여성이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것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던 시기다. 그러나 비슈케크 중심가에 있는 옛 ‘레닌박물관(현재는 ‘국립박물관’)은 소련 붕괴 전까지 러시아혁명 당시의 여러 모습을 전시했고, 현재도 레닌은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과 러시아혁명 관련 전시물들이 그대로 있다. 여기에 지방 곳곳에 레닌 동상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성들이 노동에 참여해 경제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레닌의 동상. ⓒ김경애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레닌의 동상. ⓒ김경애

인터뷰한 고려인 여성 중 기혼한 약 70%는 사별과 이혼을 경험했다. 사별과 이혼의 경험은 심한 빈곤으로 내몰린다는 것과 같은데도 이들 모두는 자녀들을 홀로 책임져야 했다. 이혼의 경우 한국처럼 부계 혈통주의를 고수하는 것과는 달리 고려인들은 남편이 집에서 떠나고 어머니와 자녀가 남았다. 주안나(76)씨는 화가인 남편이 1973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당시 큰딸이 8살, 작은딸이 1살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로 하루에 언제라도 아기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엑스선 촬영 기술을 배워 25년간 일하면서 홀로 두 자녀를 부양했다. 남편과 별거한 끝에 사별한 서에스터(65)씨도 자식을 키우기 위해 교사, 화물관리자, 공장의 물품 조달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일자리가 없어 군대에 들어가 물품을 조달하는 행정 일을 했다. 제대한 후에는 건강식품 회사에서 관리자로 일하면서 두 자녀를 부양했는데 “책임이 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일해야 했던 여성들은 주로 친정과의 유대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이혼한 장엘리아나씨도 평생 어머니가 도와줬고 자신은 “생활비만 벌었다”며 여동생, 남동생 가족 덕분에 딸을 양육하고 교육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별한 주안나씨도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 자녀를 돌봐줬다고 회고했다. 김일리아나(31)씨도 소련 시절 우주장비 설계 엔지니어였던 어머니가 자신이 5살 때 아버지와 사별하자 자동차 공장 엔지니어로 일했던 외조부모와 함께 살면서 도움을 받았다. 이혼한 이아브차라(71)씨도 친정어머니가 같이 살면서 자녀 양육을 도와줬고 고추 농사를 지어 경제적으로도 도와줬다고 말했다.

고아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온 80대 곽예봐나씨, 홀로 자식을 키우고 벼룩시장에서 헌옷 장사를 하는 이아브라차씨를 비롯해 대다수가 자신들은 잘살아 왔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10만원이 되지 않는 연금으로 홀로 겨우 살아가도 그 행복감이 크다고 했다. 비슈케크에 온 이래 고려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는데, 이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행복이라고 포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에스터씨가 우여곡절의 자신의 삶을 두고 “내 인생은 참 재미있었다”고 표현한 것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자신만의 언어였다. 고려인 여성들이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살아온 것을 대변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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