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심 선고 뒤집은 대법원 판례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 무시하고

가해자의 착각과 오해만 보호?

 

250개 여성‧인권‧시민‧사회 단체들이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동문 앞에서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의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무죄판결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50개 여성‧인권‧시민‧사회 단체들이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동문 앞에서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의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무죄판결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일 수 있지만, 강제추행죄에서 요구하는 폭행 또는 협박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속옷 차림으로 여직원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시키고 “더 위로, 다른 곳도 만져라”라고 요구해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사장 무죄. 1심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 치료강의 80시간 선고.

# “‘이건 강간이야’라는 말에 성행위를 중단했다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어.”

-옛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무죄. 원심은 징역 1년6월에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 선고.

# “두려움과 강요로 인해 서신 등을 작성했다는 피해자 진술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피해자의 진술 선뜻 믿기 어려워.”

-27세 어린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연예기획사 대표 무죄. 1심은 징역 12년, 2심은 징역 9년 선고.

최근 1심과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성폭력 사건이 대법원에서 잇따라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되면서 불평등한 권력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성폭력을 묵인하거나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0월 23일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 뒤집기 대토론회’를 열고 “성 편향적인 사법 관행을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을 분석한 조소연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같은 사건임에도 1, 2심과 대법원의 판결이 다른 이유는 결국 피해자의 말에 재판부가 얼마만큼 귀를 기울였는가에 있다”며 “피해자가 증인으로 출석해 진술을 직접 들었던 1,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이미 피고인에게 여러 차례 범죄 피해를 당해 임신까지 한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문제는 법원의 왜곡된 피해자상에 있다”고 지적했다. “1심과 2심의 판결에서 피해자는 연약하고 미성숙해서 보호받아 마땅한 피해자로 인식됐고, 대법원은 피해자의 적극적 애정표현이나 피고인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해 피해자를 보호받을 필요가 없는 의심스러운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이건 강간이야’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가 ‘이건 강간이야’라는 말을 함으로써 가해자가 삽입을 중단하고 사과를 하는 등 사건 전개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게 분석되어야 한다”며 “실상은 피해자의 의사가 계속 무시되고 있다가 ‘이건 강간이야’라고 외침으로써 간신히 그 의사가 관철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여성의 ‘NO’는 ‘YES’라는 강간신화를 지지·옹호한 것으로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강사는 ‘여직원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타인의 신체를 만지는 행위여야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추행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며 “강제추행죄의 해석에서 법원은 문제가 된 행위가 추행인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피해자의 의사와 성별, 나이, 행위자와 피해자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 주위의 객관적 상황,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성적자기결정권이라고 한다면 강간죄의 성립 여부를 가해자에 의한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의사를 무시한 성행위가 있었느냐는 피해자 의사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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