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아쇼카 펠로’ 선정된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표

적성 맞고 경제적 자립 가능하면 ‘좋은 일자리’ 

전교 50등까지 유리벽 교실서 자습 “줄 세우기 교육 바뀌어야”  

사교육비 2조원 경감에 기여, ‘수포자 없는 입시플랜’ 결실 

 

반백의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깐깐한 윤리 교사 같았다. 그는 “사실 대표로 불리는 것보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편하다. 나는 그냥 길거리 선생”이라며 웃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반백의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깐깐한 윤리 교사 같았다. 그는 “사실 대표로 불리는 것보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편하다. 나는 그냥 길거리 선생”이라며 웃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저는 그냥 길거리 선생이죠.”  

올해 첫 ‘아쇼카 펠로(Ashoka Fellow)’에 선정된 송인수(51)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깐깐한 윤리 교사 같았다. 반백의 그는 “대표로 불리는 것보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편하다”며 웃었다. 그는 13년간 신림고, 삼성고, 구로고 교사를 지냈다. 교사를 그만둔 지 벌써 13년째인데도 여전히 선생님이란 옷이 자신에게 잘 맞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아쇼카에서 운동의 족보 찾았다”

사단법인 아쇼카 한국은 그를 사회혁신기업가인 아쇼카 펠로에 선정하면서 “대한민국 최대 난제로 여겨지는 입시 경쟁 교육과 사교육 과열이란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해 최초의 전국 단위 시민운동 모델을 제시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학부모를 ‘교육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내세운 데 주목했다. 아쇼카 한국은 “그가 이끄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2009년 특목고 입시 방식의 문제점을 해결해 사교육비 2조원을 줄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작년 9월부터 시행 중인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킨 주역”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서울 용산구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만난 송 대표는 “1년 전 아쇼카 펠로에 선정한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거절했다”며 “재차 요청이 왔다. 나 역시 아쇼카라는 사회혁신가 모델을 보면서 내 운동의 족보를 찾은 것 같아 개인적으로 의미 깊었다”고 말했다. 그가 ‘운동의 족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난 7년간 외로운 싸움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에게 이상한 존재로 비쳐졌다. 진영 논리가 아니라 학부모를 갑으로 두고 교육 개혁을 한다는 건 순탄치 않았다. 송 대표는 지난 8년간 무수히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때려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가볍게 웃었다.

-왜 시민을 운동의 주체로 삼았나.

“보통은 의식 개혁을 제도 개선의 종착점으로 여긴다. 우리는 의식 개혁이 제도 개선의 출발점이라고 봤다. 일제고사나 줄 세우기 정책이 문제가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도 어떻게 명맥을 유지한 걸까. 그건 우리 머릿속에 한 줄 세우기나 일등을 우대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제도를 바꾸려면 나쁜 의식과 대결하는 운동부터 해야 한다.”

-올해 ‘수포자도 웃는 신나는 수학’ 6강이 부모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시민 교육에 유독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렇다. 온라인 강의도 별로 없던 2008년 출범 당시부터 강의를 온라인으로 유통했다. 매년 학부모를 대상으로 30∼40강씩 온·오프라인 강의를 하고 있다. 캠페인도 많이 하는 편이다. 소책자가 호응이 높았다. 공짜로 나눠주면 안 읽으니 초기에는 300∼400원 실비를 받았다. 『아깝다 학원비!』 『아깝다! 영어 헛고생』 『찾았다 진로!』는 모두 합쳐 200만 부 보급됐다.”

-지난 3년간 ‘수포자 운동’을 벌였고 올해 학습량이 줄어드는 결실을 거뒀다.

“‘수학 고통’이 너무 심하다. 수학 교과에 대한 패배감이 모든 교과의 학습 의욕 쇠퇴로 연결된다. 그래서 ‘수포자(수학 포기자) 없는 입시 플랜’이라는 수학 교육 개선 운동을 시작했다. 개정 교육과정에서 수학 학습량 20% 경감이란 성과는 못 거뒀지만 이과 선택과목과 미적분 학습량이 줄었다. 지난해부터 수능 수학이 쉬워진 것도 성과다.

수학 학계는 청와대도 입장을 꺾지 못할 만큼 힘이 세다. 지금까지의 교육과정 논의는 정부와 학계, 교사 등 이해당사자들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국민이 학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싸움에 갑자기 시민이 끼어들었다. 공청회 때 보니 수학 학계가 많이 당황해하더라. 시민들이 나서서 일한 보람이 컸다.”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초등 6년, 중학 3년 동안 하루 2시간씩 꼬박꼬박 성실하게 학원에 다닌 아이들은 자립심과 역행하는 9년을 보낸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초등 6년, 중학 3년 동안 하루 2시간씩 꼬박꼬박 성실하게 학원에 다닌 아이들은 자립심과 역행하는 9년을 보낸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수능 수학 절대평가 돼야 ‘수포자’ 줄어

송 대표는 “나머지 반쪽의 과제가 남았다”며 “수능 수학 시험 범위를 재조정하고, 수능 수학 시험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한다. 9월 말부터 이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아이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규정한 세 가지 능력, 즉 자립심과 지식을 활용하는 힘, 남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힘을 학교교육에서 얻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아이들의 자립심이 왜 강해지지 않을까.

“초등 6년, 중학 3년 동안 하루 2시간씩 꼬박꼬박 성실하게 학원에 다닌 아이들은 자립심과 역행하는 9년을 보낸 셈이다. 학원 의존적 아이로 자라나면 퇴행이 불가피하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행학습만 하던 학원은 시험 보기 3주 전에 모든 선행학습을 올스톱한다. 선행학습이 그렇게 공부에 도움이 되면 계속 해야지, 왜 그만두나. 학원은 예상 문제를 30∼40배수 내서 기계적으로 풀게 한다. 시험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예상 문제를 잘 추려서 잘 풀어내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런데 학원에선 반쪽 능력을 잘라버린다.” 강사가 족집게로 다 추려준 문제만 푸는 능력만 커질 뿐 문제 해결력이나 지식 활용 능력의 촉은 다 끊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송 대표는 또 줄 세우기 교육의 폐단이 크다고 거듭 지적했다. 전교 50등까지 유리벽으로 된 자습실에서 공부를 시키거나 성적 순서대로 차례로 급식을 배식하는 식의 차별 행위는 학교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철저하게 동질 그룹을 선호해 아이들이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갈수록 뒤처진다. 성적순으로 구분되는 고교 체제가 배움의 힘을 깎아먹고 경쟁력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다. 그는 성공한 인생에 대한 기준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30대 대기업과 공기업을 좋은 일자리로 본다. 그러려면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특목고에 가야 한다. 그런데 그 일자리가 한 해 창출하는 신규 고용 인력은 2만 개에 불과하다. 한 해 졸업생은 54만∼56만 명이다. 한 반 30명 중 한 명만 그 자리에 가고 나머지는 루저라는 거다. 세상에 태어나서 출발점에 서기 전부터 루저가 될 가능성이 90% 이상이란 얘기다. 수단이 돼야 할 직업이 절대 기준이 됐다. 적성에 맞고, 직업으로 남에게 봉사할 수 있고,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면 좋은 일자리다. 연봉과 일자리가 기준이 돼선 안 된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힘겹게 공부를 이어갔다. 가장의 역할은 아픈 아버지 대신 어머니 몫이었다. 일반 중학교 대신 학비가 들지 않는 고등공민학교를 갔다. 그러다 다시 시내 중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중학교에 들어간 후 공부만 파고들어 서울대 영어교육과에 들어갔다.

이후 교사의 길에 들어선 그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왔다. 처음 담임을 맡았는데 15등 이내 아이들의 집에 전화해서 불법 찬조금을 걷어야 했던 것이다. 한 반에 300만원씩 12반에서 3600만원을 모아 야간자율학습이나 0교시 수업 수당과 교장교감 관리비, 회식비 등 비자금으로 썼다. 

“양심 때문에 못 하겠다”는 그와 부장교사와의 언쟁이 이어졌다. 어느 날 부장교사가 회의 도중 다른 교사들을 나가게 하고 육두문자와 함께 ‘나도 널 선생이라고 하지 않겠다. 너도 날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그에게 돌진했다. 옆자리에 있던 그를 피해 두 달 동안 교무실 대신 아무도 없는 지하 보일러실로 출퇴근하면서 지냈다. 자긍심이 바닥난 상태에서 선교한국대회를 갔고 거기서 신의 소명을 받았다.

“양심 때문에 불법 찬조금 못 걷는다”

“나는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소명을 받은 순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용기가 생기는 걸 느꼈다. 그 뒤 두려움 없이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이때를 기점으로 달라졌다. 1995년 좋은교사운동 전신인 기독교사연합 창립 후 상임총무 일을 시작했다. 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되면서 가입 여부를 고민하던 그와 동료 기독 교사들은 2000년 ‘좋은교사운동’을 시작했다. 좋은교사운동에 투신하려고 기어이 교사직을 내려놓았다. 대표직까지 포함하면 13년간 일했다.

-당시 전교조, 교총이란 정치적 지형 속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활동했다.

“우리 사회에서 교원평가제도를 운동 차원에서 최초로 제안한 곳이 좋은교사운동이다. 또 교육정보화시스템(NEIS) 사태로 교육계가 혼란 속에 있을 때 중재안을 내놓아 타결을 이끌어냈다.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에 적극 찬성해서 보수 기독교 진영에 부담을 안겨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장 선출 보직제라는 전교조의 교장 선발 제도에도 반대하고 현재의 승진형 교장 임용제도에 반대했다. 그 대안으로 15년 자격증을 가진 평교사들이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는 교장 공모제를 제시해 현재의 교장 공모제를 이끌어내는 역할도 했다. 우리는 ‘무모한 교사들’이었다.”

-가정 방문 캠페인도 인상적이었는데.

“매년 학기 초 3∼4월에 학급 학생 모두의 가정을 방문했다. 또 학급 학생 중 어려운 학생 1인을 찾아 담임교사가 보호자가 돼주는 교사-학생 일대일 결연 캠페인, 자발적 수업 평가 캠페인, 학기 초 촌지를 받지 않는다고 가정에 편지를 보내는 정직 운동 등도 펼쳤다. 우리는 ‘무모한 교사들’이었다.”

그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더욱 무모한 도전이었다며 웃었다. 늘 “통계와 데이터로 말하지, “생짜 주장은 안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애썼다. 적은 예산인데도 고비용의 회계감사를 자청해서 받고 윤리 규정을 세워 조직을 단속하는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교육 개혁가의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고 있을까. 그 역시 ‘보통 부모’였다. ‘고4’(재수생)인 큰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이 맺혔다. 그 역시 자식 때문에 애면글면하는 여느 부모와 똑같았다.

아이와 관계가 풀린 계기는 윤지희 공동대표의 권유로 2010년 중2 아들과 둘이서만 10박11일 해외여행을 한 뒤부터다. 충돌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아들과 가까워졌다. 나중에 그의 생일에 아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아빠도 인간이고 남자고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꼈어요’라고 썼다고 한다.

송 대표와 큰아들은 참 달랐다. 그는 정형화된 질서를 잘 따르는 범생이 같은 스타일인 데 반해 아들은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아이는 범생이 부모를 향해 감정의 셔터를 내려버렸다. 그는 부모로서 준비한 시간표를 버렸다. 부모는 그 시간표를 놓치면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망칠 것 같아서 자꾸만 가두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정신적 부모가 되는 순간 아이는 부모가 내민 손을 잡는다는 것이다. 교육 개혁가인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으로 아이를 밀다 관계가 파탄 난 부자가 많다. 부모는 자식을 기르면서 욕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육체적 부모에서 정신적 부모가 되는 순간이다. 난 큰아들이 중1 때 내려놓았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아이란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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