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여성 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레즈비언 미디어 단체 레주파 등 성소수자 인권단체 대표 참가자들이 여성성소수자 궐기선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0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여성 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레즈비언 미디어 단체 레주파 등 성소수자 인권단체 대표 참가자들이 여성성소수자 궐기선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잠시 방문한 미국의 버클리대, 참으로 생기 있어 보인다. ‘정자를 아껴라(Save Sperm).’ 운율 맞춰 소리치는 열 댓 명의 남자 대학생들의 행진이 여유롭게 느껴지는가 하면, 그 옆에서는 요란한 옷차림으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여학생들의 라이브 공연이 눈길을 끈다.

캠퍼스 자체가 공연이고, 시위이고, 무대다. 학교 서문 쪽 입구에서는 위민 인 블랙(Women in Black) 회원들이 나와 거리 시위를 한다. 그들을 책에서만 본 내게는 그 시위가 경이롭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니 다가와 전단지를 건넨다. 팔레스타인 하마스에게 총격을 당한 이스라엘 가족 이야기다. 이러한 사태에 무책임한 미국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에 평화적 해결을 촉구한다. 1960년대 반전운동, 학생운동, 문화운동의 상징인 버클리의 역사성과 전통성이 또 그렇게 여러 색채로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꽤 조용하고 모범적인 한국의 대학가에 비하면 오히려 버클리의 생기는 제멋대로다. 무질서하게 자유롭다. 그러면서도 아시아계, 히스패닉계, 아프리카계 등 다양한 유색 인종들의 다양한 언어들이 귓가를 스치고, 버스 운전기사에게 “생큐” 하며 내리는 버클리 거리에서 느끼는 친절을 나는 한국에서 받아본 적이 있는가 하는 자문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거리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노숙자와 장애인이다. 서울에서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숨겨진’ 그 사람들이 이 거리에 자주 보인다는 것은 거리에서나마 거주할 권리와 이동할 권리가 상대적으로 보장돼 있음을 함의한다. 노숙자들은 베이지역의 집세가 폭등해 일어나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지만, 은폐의 대상이 아니라 버클리를 구성하는 공동체 안에 있다. 그리고 화장실의 배치부터 정체성의 존중이 드러나는 성적 소수자의 존재감도 있다. 여성과 남성으로만 식별하지 않는 성의 다양성과 성차별을 대신하는 성 중립성이 깔려 있다.

그러나 다양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자유주의 맥락에서 작동하면, 차이는 관용의 통치 원리를 통해 관리의 대상이 되기 쉽다.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한국 사회가 이미 그렇다.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은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권력 관계에서 차이는 질서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베푸는 관용을 통해 기존 질서를 보존하는 범위 안에서 관리된다고 말한다. 최근 미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는 관용담론으로 집단의 차이와 갈등, 차별을 다루어왔다. 그래서 누가 포용되고 배제되며 동시에 그들은 누구인가가 규범으로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이성애자 여성은 성평등의 대상이 되지만, 동성애자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

더 이상 은폐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사회 소수자들의 주체를 드러내는 버클리의 정경은 꽤 진보적이다. 그런데 배려나 시혜와 같은 관용의 대상이 아닌,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은 더 정의롭다. 지난 10월 10일 성평등조례 개정과 관련한 여성 성적소수자 서울시청 앞 집회는 그러한 의미에서 참 역사적이다. 이삼십 년 후 한국의 다양한 사회의 미래 모습을 버클리 거리에서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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