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 젠더로 접근하라 - 핀란드│⑤ 노인주거공동체 ‘로푸키리’

부지 선정, 공간 설계, 세부 규칙도 입주자끼리 결정

 

투울라씨가 자신의 개인 주거 공간에서 책을 보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투울라씨가 자신의 개인 주거 공간에서 책을 보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핀란드는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가 진행된 유럽 국가 중에서도 고령화 속도가 빠른 편이다. 핀란드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현재 18%에서 2020년에는 26%로 상승할 전망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처럼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문화가 없는 핀란드에선 노인들이 거동이 불편해 양로원 등 노인시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혼자 살거나 부부만 산다. 특히 평균수명이 긴 여성 노인은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90년대 경기침체로 인해 핀란드 정부가 노인복지 관련 예산을 줄이자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노인자살률이 급증했다. 이 때문에 노인 고립과 자살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로푸키리다.

지난 2000년 달스트롬(Marja Dahlstrom)씨 등 은퇴한 할머니 4명이 “외롭지 않게 모여 살자”고 모인 것이 시작이었다. 그들은 그해 8월 활동적 노인협회(The Active Senior Association)를 세웠다. 노인을 위한 집을 짓기로 정한 후 엔지니어, 건축가, 재정 전문가를 찾아 나섰고, 이들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금세 7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 가운데 80%는 여성이었다. 반향이 커지자 헬싱키 시를 통해 행정적인 부분과 시유지 임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협회는 시유지 가운데 아라비안타 지역으로 부지를 정했지만, 로푸키리가 만들어지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주택 조합을 설립하고, 입주자를 모으고 공간 설계부터 세부 규칙을 정하는 것도 입주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은 입주자들이 모인 기획회의를 통해 정해졌다. 매달 한 번씩 열린 회의에서는 분야별로 세세한 것들을 직접 결정했다. 수마리(Terhikki Sumari)씨의 경우, 주방 분야를 맡았는데 어떤 모양의 포크를 살지부터 주방용품 종류와 향신료 종류, 이것을 어디에 비치할지도 모두의 의견을 모아 결정했다. 로푸키리보다 앞서 노인 전용주택을 짓기 시작한 스웨덴 사례도 직접 찾아다녔다. 입주자들이 발품을 팔아 모든 것을 정한 만큼 이들이 로푸키리에 갖는 애정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로푸키리의 입주금은 36㎡(10평) 기준 7만2800유로(2억2900만원) 정도다. 주변 아파트 시세보다 약간 저렴한 편이다.

2006년 합류한 탈베라(Tuula Talvela·69)씨는 73.5㎡(22평) 개인 공간에서 혼자 살고 있다. 1996년 남편과 사별한 후 오랫동안 혼자 산 그는 로푸키리에 정착하기 전까지 5번이나 집을 옮겨 다녔다고 했다. 도전을 즐기는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푸키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는 10년을 내리 살았다. “매일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었고 즐거웠다”는 게 그 이유다.

 

투울라씨와 테리이끼씨가 여가활동 일정과 참여자 명단이 적힌 노트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투울라씨와 테리이끼씨가 여가활동 일정과 참여자 명단이 적힌 노트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탈베라씨의 집은 작은 갤러리나 도서관을 떠올릴 정도로 그림과 책이 가득했다. 로푸키리 입주자 클럽 중 하나인 미술클럽에서 활동하며 직접 그린 그림도 벽에 걸려 있었다. 방 2개와 거실, 주방, 욕실로 구성된 집은 아늑했다. 아침과 저녁 식사는 직접 준비하고 저녁은 입주자들과 함께 즐긴다고 했다. 저녁 식사는 1회에 4유로(5200원)로 저렴한 편이다.

그는 로푸키리에서의 삶에 대해 “만족스럽다”고 했다. “입주자가 어떤 일을 제안하면 실현이 되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설명이다. 특히 탈베라씨는 지난 6월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이웃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혼자 살지만 이웃들이 건네는 위로와 응원 덕분에 많은 힘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든 로푸키리를 떠나 이사를 갈 계획이라고 했다. 새로이 정착할 곳은 제2의 로푸키리인 코티사타마(Kotisatama)다. 로푸키리 모델이 핀란드 안에서 큰 호응을 얻으면서 수요가 커졌다. 2008년 헬싱키 인근 칼라사타마(Kalasatama) 지역에 건립되기 시작한 코티사타마는 지난 9월 말 7년 만에 문을 열었다. 탈베라씨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좋아해 코티사타마 이사를 결정했다”며 “그곳에서도 마음 맞는 이웃들과 함께 코티사타마의 문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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