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뚫은 알파걸 늘었다고 여성이 행복한가

시린 M. 라이(Shrin M. Rai)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 방한

신자유주의 시대 삶의 불안정성이 여성 혐오 조장

여성운동, 사회구조 바꾸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여성 간 차이 넘어 연대하려면 ‘귀 기울이고 실천하라’

 

시린 라이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가 지난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후마니타스 제공
시린 라이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가 지난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후마니타스 제공

“지금처럼 복지국가의 위상이 약화되는 시기에는 여성들이 복지재정 축소의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제도적 질서를 다시 구축하지 않고는 이에 맞설 수가 없어요. 일상적 차별·혐오에 맞서는 일도 여성운동의 중요한 과제지만, 정치·경제 구조가 낳은 성 불평등을 꿰뚫어 보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시린 라이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가 지난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한국 독자들과 만났다. 인도 출신 정치학자인 그는 발전과 지구화의 문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주로 제3세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탈식민 국가의 발전, 지구화가 젠더 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했으며, 유엔 산하 조직들에서 강연과 자문 활동도 하고 있다. 민족주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여성의 삶을 둘러싼 변화와 여성운동 진영의 논쟁을 다룬 그의 저작 『젠더와 발전의 정치경제』(후마니타스)는 지난해 제자인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의 번역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이진옥 대표와 허성우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포함해 3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화기애애하면서도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라이 교수와 독자들의 대화를 일문일답 식으로 편집했다.

- 최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여성혐오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여성혐오 현상은 최근 세계경제의 흐름과 연관이 깊다. ‘중국이 기침을 하면 세계경제가 독감에 걸린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세계 금융 질서는 불안정한 데다가, 자원 부족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리 삶의 불안정성도 심화됐다. 이런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영국에서도 여성 혐오는 일상적인 문제다. 여전히 여성 의원들은 옷을 입었을 때 가슴골이 보이는지, 어떤 구두를 신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남성 의원들에게 듣고 있다.”

- 일상에 만연한 여성차별·혐오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높아졌다. 그러나 남녀 간 임금격차 등 지표를 보면 경제적 성평등 실현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 여성의 정체성 투쟁이 그간 상당한 성과를 거뒀으나 공평한 분배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영국의 예를 들면, 2006년 젠더, 인종, 성적 지향, 장애 등의 문제를 평등의 문제로 통합해 논의하는 평등법(Equality Act)이 제정되면서 다양성을 제도적으로 인정하게 됐다. 그러나 성 불평등은 여전히 굳건하며, 교육과 복지에 대한 국가재정이 삭감되는 상황에서 가장 타격을 입는 것은 싱글맘을 비롯한 여성들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의 현실은 어떤가?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속에서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했다.(1950~2000년 전 세계 여성 고용률은 46%에서 81%로 늘었다.) 하지만 성별에 따른 노동분업은 여전하다. 구조조정 등으로 여성들의 일자리는 불안정해졌고 여성 내부의 계급적 격차도 커졌다. 여기에 가사노동까지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적 지구화의 혜택은 누리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비용은 불공평하게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여성 혐오에 맞서는 일만큼이나, 이런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고민과 투쟁이 중요하다. 여성운동이 ‘재분배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서구 여성운동은 국가와 제도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전략을 택했다. 이제는 국가제도와 자원 재분배에 문제를 제기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비판적으로 개입할 때다.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권력 구조 모두를 변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정치’에 있다. 최근 영국에서 조직된 새 정당 ‘여성당’(Women’s Equality Party)처럼, 여성의 역량강화·세력화뿐만 아니라 제도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실천이 무척 중요하다.”

 

지난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시린 라이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와의 만남에 참여한 독자들. ⓒ후마니타스 제공
지난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시린 라이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와의 만남에 참여한 독자들. ⓒ후마니타스 제공

- 여성운동 내부의 차이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의 차이를 묵과하지 않으면서 연대를 꾀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중요한 지적이다. 여성들은 그간 계급·종교·성별 등에 따른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에 주목했는데, 목소리를 내는 일에 비해 ‘듣고 실천하기’의 중요성은 덜 강조됐다. 아프리카 여성들에 대한 할례가 악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악습을 비판하고 개탄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그들의 삶을 실제로 개선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연대의 다리를 짓는 데에는 도덕적 판단보다 실천이 더 필요하다.”

-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여성 페미니스트 여러분이 현실 문제의 정치적·경제적 맥락을 이해하길 바란다. 정치와 노동이 어떻게 분배를 결정하는가를 아는 게 중요하다. 한국은 물론 세계 정치·경제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 고민할 수는 있게 해 준다. 또 국경을 넘어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하기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