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벌레 기분 나쁠 것 같지만, 최근 벌레 충(蟲)이 인기다. 그러나 맘충, 노인충, 급식충, 무임충, 자전거충은 이참에 이름을 얻은 것일 뿐,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일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그전에도 아이를 데리고 맘 편하게 식당이나 카페를 갈 수 있는 젊은 엄마는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육아는 사적으로 해결할 일이었다. 장애인들의 보행권 투쟁 이후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에서 눈에 띈 것처럼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일 뿐이다. 주부우울증은 아이와 집에서 벽장처럼 있을 때 생기는 병이다. 이제 젊은 엄마들이 집에만 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낯설다.

 

나는 전철에서 큰소리치는 노인보다는 미안해하는 노인을 열 배는 더 많이 접한다. 버스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타는 노인들은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친절한 버스 운전기사도 있지만 거치적거리니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짜증 내는 운전사도 많이 봤고 자리 양보 안 하는 젊은이도 많이 봤지만 짐을 들어주는 젊은이도 많이 봤다. 그 할머니는 대체 누구를 위해 그렇게 많은 장을 보고 버스를 타는 것일까. 동네에서 좌판을 깔아 생계를 유지하거나 자식을 먹이려고 하는 것일 게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것, 장애를 갖거나 늙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설명하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당사자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울지 않고 소리도 지르지 않고 물도 엎지르지 않는 아이는 없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점차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갈 것이다. 젊은 부부 역시 사회 속에서 부모의 역할을 배우고 누군가를 돌보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끄러웠던 아이가 침 뱉는 청소년이 되고 고뇌하는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마침내 모두 늙는다는 것을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관용이다. 세상엔 스마트하고 독립적인 소비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가 걱정스러운 것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대체한다는 데에 있다. 군 문제나 청년 실업 등의 문제는 분명 중요한 사회문제이기 때문에 사회적 운동이나 정치적 의제가 돼야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분노로 해소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임금피크제를 해야 청년 취업이 증가한다는 것처럼 세대 간 갈등만 조장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해법들이 판을 치니 걱정인 것이다.

2010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리치아 론줄리 의원은 아이를 안고 의회에 참석했다. 옆에 있는 남성 의원과 미소를 띠며 투표를 하는 모습이 낯설고 신선하고 부러웠다. 육아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사회는 불가능할까. 아마도 지금 혐오 발언의 발화자가 누구인지, 아프다고 소리치는 그 세대의 아픔에 대해 먼저 공감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일지 모른다. 우리는 충분히 더 공감하고 서로 좋은 삶을 꿈꾸는 친구이자 연대할 시민이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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