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나눔 콘서트 펼치는 ‘자매 연주자’ 송원진-세진씨

언니 원진씨는 ‘베토벤 바이러스’ 주인공 실제 연주자

동생 세진씨는 ‘소리선물’ ‘음악으로 역사를 읽다’ 직접 기획

낭만과 우수, 화려함과 비극 뒤섞인 러시아 음악 전도사

17년간 러시아서 수학 “소설가 엄마가 우리를 만들었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송원진(맨 왼쪽)씨와 세진(가운데) 자매는 다른 듯 닮았다. 언니는 열정적이면서도 원칙적이었고, 동생은 그보다 친근했다. 어머니 공영희씨와 함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송원진(맨 왼쪽)씨와 세진(가운데) 자매는 다른 듯 닮았다. 언니는 열정적이면서도 원칙적이었고, 동생은 그보다 친근했다. 어머니 공영희씨와 함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만난 예술가 자매는 다른 듯 닮았다. 언니는 열정적이면서도 원칙적이었고, 동생은 그보다 친근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무대에 서기까지 지독히 악기를 파고드는 ‘연습벌레’라는 점. 언니는 바이올리니스트, 막내는 피아니스트. 요즘 예술계에서 ‘자매 연주자’로 유명한 송원진(36), 세진(34)씨 이야기다.

“전 모든 일이 마이너스부터 시작해서 올라가고, 동생은 위에서부터 내려와요. 그러다 중간에 만나죠.” 언니 원진씨의 농담에 세진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이 자매의 행보가 눈에 띈다. 클래식 대중화에도 열심이고, 나눔 콘서트도 꾸준히 열고 있어서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음악 기부

우선 덕수궁 석조전에서 지난 3∼8월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오후 7시에 연 ‘음악으로 역사를 읽다’ 공연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또 이들이 교수로 있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2층 대강의장에선 지역 주민들을 위해 5년째 매주 수요일 낮 12시 30분부터 무료로 ‘MBA 콘서트’를 열고 있다.

이와 함께 매달 셋째 주 일요일 오후 1시 금호아트홀에서 ‘소리선물 콘서트’도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입장료는 점심식사 가격 수준인 5000원. 티켓 수익금은 전액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청기 구입과 저소득층 어린이 지원에 쓰인다. 강의도 바쁜데 젊은 음악인들이 사회공헌에 이렇게 열심인 사연이 궁금하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받은 재능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어요. 연주자로 제자리를 잡게 된 것은 주변의 도움이 컸으니까요. 가족이 함께 연주회에 오면 10만원이 훌쩍 넘는데 커피 한 잔 값으로 연주도 듣고 기부도 하는 기분 좋은 일을 함께 하자는 거죠.”

원진씨의 말을 동생이 받았다. “우린 연주자니까 무대에서 청중을 바라보는데 가끔 청중석에 앉을 때도 있어요. 옆을 흘낏 보면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띄더라고요. 한 시간 반 동안 하루의 고단함을 털고 나갈 수 있으니까요. 연주회에 오신 그 순간만은 예술로 힐링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특히 ‘음악으로 역사를 읽다’는 당초 아무도 안 올지 모른다며 노심초사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관객이 몰려들어 이들도 깜짝 놀랐단다. 1∼2분 안에 서버가 다운될 만큼 인기를 끈 데다 공중파 뉴스에도 나와 뿌듯하다. 이들은 ‘행진곡을 사랑한 고종 황제’ ‘피아니스트 김영환이 초대한 음악가들’ 등 다양한 주제로 공연을 열었다. 지난해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재개관 때 오프닝 연주를 한 인연이 이번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1910년대 석조전에서 열린 고종 황제의 생신 연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이 황제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는 기록이 밑바탕이 됐어요. 고종 황제가 들은 ‘몽금포 타령’에 애국가를 넣어 편곡했어요. 제가 졸지에 애국가 전문가가 됐잖아요.(웃음) 클래식 연주자가 국악을 편곡한다니 다들 걱정했어요. 대한제국 당시에 살았던 고종 황제와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었거든요.” 공연을 기획한 세진씨의 말이다.

자매는 낭만과 우수, 화려함과 비극이 뒤섞인 러시아 음악 전도사로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원진씨는 러시아의 광활하고 음울한 음악 세계를 표현해내는 열정적인 연주로, 세진씨 역시 슬라브 감성을 담아 러시아 특유의 세밀하고 정확한 리듬감이 살아 있는 피아노 연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자매의 오늘을 만든 것은 소설가인 어머니 공영희씨다. 공씨는 전주여고 재학 중 경희대 주최 전국 문예 콩쿠르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모스크바에 살 당시 한인 신문에 소설과 칼럼을 연재하고 해외문학 편집위원도 지냈다. 또 『섬에서 만난 아이』로 해외문학상을, 중국연변소설가학회 주최 두만강 문학상을 받았다.

공씨가 자매를 데리고 러시아행 비행기를 탄 것은 1992년이다. 딸들의 음악 인생을 위해 서양음악의 본거지로 떠난 것이다. 공씨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황량한 동토의 땅에 연고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안 간다”며 웃었다.

원래는 오스트리아를 유학지로 선택했는데 3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는 말에 러시아로 방향을 틀었다. 소련 해체로 문호가 개방된 바로 이듬해였다. 원진씨는 예원중 1학년, 세진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17년간 살았다. 원진씨는 모스크바 국립 차이콥스키 음악원 석사, 세진씨는 같은 대학 박사를 마쳤다. 특히 세진씨는 스물여섯 살에 모스크바 국제 음악 콩쿠르 슬라브음악 심사위원을 맡을 만큼 역량을 인정받았다.

 

8월 26일 서울 중구 덕수궁 석조전 음악회에서 송원진-세진 자매가 연주를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8월 26일 서울 중구 덕수궁 석조전 음악회에서 송원진-세진 자매가 연주를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악기 탓, 연장 탓 말라… 연습이 중요 

낯선 땅에 도착한 자매는 언어부터 익혀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 특이한 어학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문학 원전을 읽고 에세이를 쓰도록 했다. 모스크바에 가기 전에도 서가에는 책이 빼곡히 차 있었다. 그런데 아동 도서나 그림책 한 권도 없고 두꺼운 위인전이나 깨알 같은 활자가 새겨진 문학 작품집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소설가 엄마 덕에 책을 읽으면서 자라난 자매가 유학 온 후 푸시킨, 톨스토이 원전을 독파했으니 어학 실력도 몇 단계씩 좋아졌다. 문학과 음악은 샴쌍둥이와 같다는 게 자매의 말이다. 많은 작곡가들이 문학을 사랑했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특히 오페라는 문학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힘든 장르다. 두 세계는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행을 택한 스포츠 스타들이 있다. 김연아 선수는 러시아에서 수학하지 않았지만 안현수 선수나 손연재 선수는 과감히 러시아행을 선택했다. 공씨는 “러시아의 교육 시스템은 철저하다. ‘대충’ ‘설렁설렁’이라는 단어가 없다. 기본기가 충실하고 의무감도 투철하다”고 전했다. 공씨는 특히 “선생님들의 열정이 학생들 못지않다. 부모보다 더 세세하게 문제점을 해결하고 같이 의논한다. 학생이 꼭 할 수 있도록 채찍질하기보다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고 덧붙였다.

공씨는 엄마들이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 자기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 눈과 내 마음으로 아이들을 살피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얘기다. 자매를 예술가로 키워낸 그 역시 어려서부터 둘을 비교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음악교육이 러시아로부터 배울 점은 무엇일까. 원진씨는 “러시아는 길게, 깊게 가르친다. 심화 학습을 하는 점은 우리 교육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매는 예비 꿈나무의 성장에 다른 학생과의 비교는 방해가 된다고 꼬집었다. 세진씨는 “나는 요즘도 A양에게 B양이 무슨 곡을 연습하는지 얘기하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 기교와 속도가 다르다. 되레 비교를 하면 아이는 열심히 연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건 대학교 3학년이건 똑같은 언어로 가르쳐요. ‘네가 이걸 못했을 때 무대에선 100% 연주자 책임이다. 네가 해야 할 의무다’라고 말하죠. 우리나라 엄마들은 이번 학기 점수가 잘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더라고요. 하지만 당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10년 뒤를 봐야 해요.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오래 할 수 있어야죠.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원진씨도 생각이 비슷했다. “모스크바에선 교수들이 늘 악기 탓, 연장 탓 하지 말라고 해요. 못하는 건 악기 탓이 아니라 네가 연습을 안 하는 탓이라고 하죠. 귀국해보니 우리나라는 악기 탓을 많이 하는 편이더군요.”

 

예술가 자매를 키운 공영희씨는 “엄마들이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 자기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예술가 자매를 키운 공영희씨는 “엄마들이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 자기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클래식 대중화 위해 더 뛰겠다

자매는 귀국 후 음악계에서 차분히 제자리를 잡아 나갔다. 원진씨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여주인공 두루미의 실제 연주자로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다. “모스크바에서 제가 막 한국에 들어온 뒤 우리 현실을 보고 충격이 컸어요. 러시아는 예술 환경이 좋아요. 클래식을 너무 좋아하는 민족이라 박물관, 갤러리마다 그랜드피아노가 있어요. 클래식을 고루하고 지루하게 느끼지 않도록 가깝게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에 연주를 결심했어요. ‘제 얼굴 안 나가니까 연주해 드릴게요’라고 했죠.(웃음) ‘베토벤 바이러스’는 최초의 클래식 드라마로 방영 전부터 말이 엄청 많았어요. 주변의 걱정과 우려도 컸지요. 드라마에 제 콘서트 포스터가 등장하기도 했지요.”(원진씨) 이 드라마에선 세진씨도 강마에(김명민)의 피아노 대역 연기로 나섰다.

원진씨는 특히 김연아 선수의 아이스쇼 공연 당시 ‘죽음의 무도’를 라이브 연주로 들려줘 개성을 과시했다. 자매는 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는 러시아 대통령을 위한 청와대 행사에서 러시아 대통령이 놀랄 정도의 연주를 선보였다.

이들은 요즘 연주뿐 아니라 문학평론, 음악기획자로도 재능을 꽃피우고 있다. 원진씨는 이미 『러시아 문학과 오페라』 등 책 4권을 냈다. 『불멸의 사랑 이야기』『창의학 콘서트』를 낸 세진씨는 ‘소리 선물’ 등 음악 기획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술과 대중의 경계를 허물면서 새로운 기획을 하고 싶어요. 지금도 아이디어가 많이 샘솟아요. 창의적인 음악회를 계속 기획하고 싶어요.”(세진씨)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직업 모으기가 취미라고 농담하곤 하죠. 연주뿐 아니라 문학평론가로 책도 여러 권 냈으니까요. 엄마와 동생에게 폐가 되지 않게 멋지게 잘 살려고 해요.”(원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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