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는 연기 성장의 동력
장민호 선생 연기 본받고 싶어

 연극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초상’ 주연 맡은 서이숙

 

연극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초상’ 주연을 맡은 서이숙.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연극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초상’ 주연을 맡은 서이숙.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드라마를 끝내고 마침 스케줄이 비어서 ‘드디어 3년 만에 쉬는구나. 좀 놀아야지’ 했는데 박정희 연출가가 연극을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 스케줄이 없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더라. 대본도 읽기 전에 한다고 했다. ‘연극은 무조건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최근 KBS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나말년’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 서이숙(48·사진)이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꼭두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초상’ 무대에 선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러시아 혁명기의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극심한 빈곤을 견디며 시와 예술성을 지켜냈다. 러시아 혁명 정권의 희생양이 된 그의 작품은 한동안 출판되지 못했지만, 1960년대 이후 다시 출판되면서 러시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쓴 예술가로 존경받고 있다.

주인공 마리나 츠베타예바 역을 맡은 서이숙은 “대본을 읽어 보니 ‘배우 찾기가 굉장히 힘들었겠다’ 싶었다”며 어려운 작품을 만났다고 털어놓았다. 박정희 연출가는 연습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연출가에게 공연 한 달 전에 연락이 왔으니 “찾다 찾다 나한테 온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봤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아차 싶었다. ‘다음부터는 대본을 꼭 먼저 읽어봐야겠구나’ 생각했다.(웃음) 쉽지 않은 작품이다. ‘아, 연극이 이제 좀 어렵구나’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산에 부딪힌 느낌이다. 산이 있으면 ‘저걸 넘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성격인데, 이번 작품은 도망가고 싶었다.”

연극은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기억과 회상,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등이 교차한다. 영상과 움직임 등이 다양하게 활용되며, 시적인 언어와 시의 이미지를 무대화시킨다. 러시아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가 생생하게 시대와 충돌하면서 빚어낸 비극적인 삶을 돌아보며 시대와 예술,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예술가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서이숙은 “연극 무대에 서면 연기가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이숙은 “연극 무대에 서면 연기가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마리나의 시는 직설적이다. ‘당신은 사랑이 그저 카운터에서 나누는 대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식이다. 거기서부터 재밌는 부분이 생겼다. 혁명군에 의해 집안이 파탄나고 자식과 남편도 뺏겼다. 예술가가 혁명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협도 해야 하고, 그 세계에 편승해야 하는데 고집을 안 꺾는다.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선택한 여자다.”

서이숙은 극단 활동이 점점 줄고, 갑상샘 수술까지 겹쳐 힘든 시기에도 ‘길은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연극판에서 버티던 중 2010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병원 얘기를 다룬 SBS 드라마 ‘제중원’의 명성황후 역을 맡게 됐다. 이후 ‘짝패’ ‘인수대비’ ‘상속자들’ ‘너희들은 포위됐다’ 등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며 ‘명품 조연’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방송에서 차츰 발을 넓힐 때도 연극 활동을 병행했다.

“나에게 한 약속이 있다. 20~30년 중견 선배가 되다 보니 의무와 책임이 생기는 거다. 좋은 배우들이 좋은 무대에 서줘야 연극판이 풍성해지는데, 방송 쪽으로 가신 분들이 안 오시니까 그게 싫었다. 그동안 새벽에 촬영하고 오후에 공연하면서 살았다.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안 죽더라. 무대에 서면 풍성해지고, 무대에 서야만 끊임없이 고민거리가 생기고, 그 고민으로 성장하게 된다.”

서이숙은 “어떤 배우로 남고 싶으냐”는 질문에 “장민호 선생님 같은 연기를 일생에 한 번은 하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2012년 작고한 한국 연극계의 큰 별 장민호 선생이 보여준 연기는 평생을 응축한, 삶을 툭 터트리는 연기였다. “무대에서 동작 하나로 툭 무너지는 연기였다. 가방 하나 툭 던지셨는데 울음이 터진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는데 숨소리 하나로 관객을 압도하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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