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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리(네팔 사람)와 어울린 풀꽃세상 회원들

엄광용/소설가

지난 4월 11일 환경운동단체 ‘풀꽃세상을위한모임’(풀꽃세상)에서

는 조촐한 티타임 행사를 마련했다. 겉모습은 ‘네팔 차나 한 잔’하

자는 가벼운 만남이지만, 그 차나 한 잔 속에는 훈훈하고 가슴 뜨거운

감동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 와서 D섬유업체에 취업한 네팔 여인 찬드라 구릉(40) 씨가 6

년 동안 행방불명되었다가 극적으로 생사 확인된 사연이 그 ‘차나 한

잔’ 속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이 모임은 그냥 차나 한 잔 하는 자리

가 아니라 네팔 여인이 어떻게 정신병원에 들어가 6년간 수용 생활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풀꽃세상’이 마련한 기자회견의 성격을 띠고 있

었다.

찬드라 구릉 씨는 1993년 11월 21일 식당에서 음식값 문제로 주인과

사소한 오해가 생겨 서울동부경찰서에 임의동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네팔인이라 말이 잘 통하지 않자, 경찰에서는 ‘1종 행려병자’로 처

리하여 7시간만에 서울 C정신병원으로 넘겼다. 한편 ‘재한네팔인공동

체’에서는 찬드라 구릉 씨를 찾는 데 주력하였으나, 마침내는 실종자

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네팔에 있는 가족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찬드라 구릉 씨의 소재가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의 일이었다.

그는 1년 전부터 재활병원에서 사회적응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이 병

원의 어느 의사가 수십 년간 네팔의료지원을 해오고 있던 이근후 박사

(이화여대교수, 정신과의사)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풀꽃세상’ 회원

인 이근후 박사는 곧바로 같은 회원이자 재한네팔인공동체 총무인 케

이피 시토라우(32) 씨에게 연락하였으며, 확인 결과 찬드라 구릉 씨가

6년 전에 실종되었던 네팔 여인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배타적인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정말 부끄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

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도 수십 년 전에는 외국에 가서 말이 잘 통하

지 않아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건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네팔 여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각박한 현실에 큰 실망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근후 박사는 ‘풀꽃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토양’이 되어버

린 우리 한국 사회를 비유적으로 비판하였다.

환경단체인 ‘풀꽃세상’에서 찬드라 구릉 씨를 위한 ‘네팔 차나 한

잔’ 모임을 갖게 된 것은, 회원들의 그러한 노력과 인연이 바탕됐다.

네팔차 한 잔을 하는 시간을 통해 한국인의 비뚤어진 인종주의에 대한

사과와 또한 자성의 시간을 겨냥했던 것이다. 네팔에서 풀씨 하나가

한국 땅까지 날아왔으나, 이 토양에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음지

에서 보낸 6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병원에서 나온다 해도

그가 받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우리가 베트남 양민 학살을 참회하고 사과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면,

우리 동시대에 일어난 이민족에 대한 한국인의 무례함을 제 때에 사과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풀꽃세상’의 실무자인 작가

최성각 씨의 말이다.

이날 티타임에는 또 한 사람의 네팔인을 초청했는데, 그는 1인평화운

동가 푸스카르 사하(30) 씨였다. 1990년 당시 대학생으로 네팔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바 있는 그는, 1998년 11월부터 네팔을 떠나 자전거로

세계 여행을 하며 ‘Peace & Love’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현

재 13개 국을 경유하여 한국에 왔으며, 앞으로 11년 동안 전세계를 일

주할 예정이란다.

‘풀꽃세상’은 ‘네팔 차나 한 잔’모임 즉석에서 네팔인 찬드라 구

릉 씨와 푸스카르 사하 씨를 위한 모금을 했다. 총 26만8천3백원이 모

금되었으며, 이 금액은 절반으로 나누어져 두 사람에게 각각 전달되었

다. 찬드라 구릉 씨는 아직 정신병원에 있기 때문에 재한네팔인공동체

총무 케이피 시토우라 씨에게 대신 전달하였고, 이튿날 북경을 경유해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푸스카르 사하 씨에게는 바로 현금을 전달했다.

“적은 액수지만 이것은 한국인의 마음의 표현으로서 그분들에게 조

금이라도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합니다.”

위로금을 전달하면서 ‘풀꽃세상’ 대표 정상명(화가) 씨가 밝힌 격

려의 말이다.

(찬드라 구릉 씨는 티타임 이후인 4월17일 정신병원에서 나왔고 26일

에는 풀꽃세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다시 한 번 모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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