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드맥스’의 한 장면.
영화 ‘매드맥스’의 한 장면.

내가 속한 단체의 단체 채팅방, 일명 ‘카톡방’에서 한때 논란이 된 일이 있다. 영화 ‘매드맥스’가 여성주의 영화라는 30대 활동가의 페이스북 글에 폭력적인 영화가 에코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단체의 페이스북에 적당하느냐는 논쟁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세대 간 의견 ‘차이’가 반갑다. 갈등이 없는 조직은 그냥 직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메르스 여파를 뚫고 순전히 그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종로에서 ‘매드맥스’를 봤다. 영화는 120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모래사막을 달리고 달리다 마침내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자 내 옆에 앉은 20대 젊은 남자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 힘들다.’

영화보다 나는 그 젊은 남자가 더 충격이었다. 남자라면 액션물을 다 좋아할 거라는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영화는 핵 전쟁 이후의 황폐화된 지구에서 녹색의 땅을 찾고 지키려는 여성들과 남자 주인공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적과 싸워 승리한다. 여성성이 지구를 구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판타지같고 2시간 내내 달리는 영화가 불편했지만 이 영화에서 에코페미니즘을 느꼈다면 두 가지를 읽은 것이다. 주체적인 행위자로서의 여전사들의 모습과 진짜 이대로 가다간 지구가 저 꼴 된다는 것.

해마다 미국에서는 흥행 영화 속의 성별, 인종, 성소수자 불평등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올해도 영화 속에서 ‘대사가 있는’ 여성 캐릭터는 약 30%였고 액션이나 어드벤처는 그렇다 쳐도 애니메이션에서조차 여성 주연은 20%에 불과했다. 영화의 관객들은 점점 다양해져 티켓 구매층의 46%가 소수인종인 데 비해 여전히 백인 주인공이 73.1%이다. 40대 이상의 여성 캐릭터는 3배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여전히 눈요기(EYECANDY)로 여성들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흥행 700편 중에 흑인 여성 감독은 3명, 아시아 여성 감독은 1명이다.

최근 몇 년 한국 영화가 유럽 영화제에 초청받지 받지 못한 이유가 상업주의에 깊게 물들어서라고 한다. 한 가지만 심는 단일 경작만큼 생태계에 위협적인 것은 없다. ‘명량’ ‘괴물’ ‘도둑들’ ‘7번방의 손님’ ‘왕이 된 남자’ ‘광해,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해운대’ ‘변호인’ ‘실미도’. 천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이 영화들에서 기억나는 여성은 한두 명이다. 철저하게 관객을 기획하는 이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 다름을 꿈꾸는 상상은 발 디딜 곳이 없다. 법조인들로 구성된 국가인권위가 인권의식은 차치하고라도 다양성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국제사회에서 망신인 것처럼 천만 명씩 한 영화를 계속 봐주는 한 우리 영화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한때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미친 듯이 사랑했고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한 시기도 있었다. ‘아바타’에서 생태주의를 읽고 ‘매드맥스’에서 여성주의를 기대하고 ‘인터스텔라’에서 과학을 봐야 하다니 서글프다. 여성 감독 지원 정책을 통해 감독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스웨덴은 너무 먼 나라 얘기여서 꺼내기가 민망하다. ‘차이나타운’과 ‘암살’을 여성 감독이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영화 속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들이 만들고 상상하는 여성성‘들’이다. 여성들이 당분간 영화를 안 보면 어떨까. 여성 감독이 30%가 될 때까지 한국 영화를 자체 등급 보류하면.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