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심리에세이로 독자 사로잡은 소설가 김형경

“아이처럼 구는 유아기 생존법 버려야 중년 위기 넘긴다”

 심리에세이 6권 저술 대중과 심리학의 가교로

“3년간 글을 쓰지 않겠다” 새로운 인생 모색 중 

 

김형경 작가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많이 웃었다. 책과 다른 인상을 전하자, 작가는 “내 책이 근엄한가 보다.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형경 작가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많이 웃었다. 책과 다른 인상을 전하자, 작가는 “내 책이 근엄한가 보다.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 정동의 한 카페로 들어선 김형경(55) 작가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많이 웃었다. 책과 다른 인상을 전하자, 작가는 “내 책이 근엄한가 보다. 키가 큰 줄 알더라.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세월』이 준 고정관념인지도 몰랐다. 486세대뿐 아니라 많은 여성 팬들이 지금도 『세월』 얘기를 한다. 자전적 성장소설이 준 힘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잿빛 바다와 전쟁 같은 양극의 사랑에 가로막힌 스무 살의 그 여자, 곧 작가 자신으로 유추되는 그녀는 파란 많은 청춘을 거쳐 한 인간으로 온전히 거듭난다.

정신과 의사 같은 소설가, 김형경

여섯 권의 소설을 발표한 그는 최근 10년 새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여섯 권의 심리에세이를 내놓았다. 『사람풍경』 『좋은 이별』 등이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으면서 심리에세이스트란 별칭도 자연스레 얻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평소 의문이 들었던 마음속이 들여다보인다. 왜 우울하고 불안했는지, 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지 삶의 은밀한 비밀 창고가 거울처럼 들여다보여 그가 소설가라기보다 정신과 의사처럼 느껴진다. 정혜신의 말처럼 “문학적 향기가 나는 정신분석서”를 내놓으며 대중과 심리학을 잇는 가교가 된 것이다.

-심리에세이는 소설가로선 외도인 셈이다. 정신분석 100회를 받은 작가가 어려운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내 독자 반응이 뜨거웠던 것 같다.

“이제는 마음을 돌볼 여력이 없이 경제 안정이 최우선 목표였던 시대에서 벗어났다. 2000년대 들어서부터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존중받는 삶을 살고 싶은 상위욕구가 생기면서 마음 치유가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심리 문제를 돌보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1960년대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보편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다. 여자들이 20년쯤 발버둥치니 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남자들도 자신을 뒤돌아보더라. 요즘은 10대들도 제 책을 많이 읽는다. 고교생들이 『좋은 이별』을 읽고 리포트를 보내왔더라. 질문도 예리해서 ‘왜 이렇게 똑똑해’ 하면서 놀란 적이 있다.”

-‘독서 성장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중한 경험』이 얼마 전에 나왔다.

“후배들과 독서 모임을 진행해오면서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책을 소개하고,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그들이 보지 못하는 마음을 읽어주면서 통찰과 지혜를 주고받았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처음에는 모임 하나로 출발했는데 5년 후쯤 일곱 개로 늘었다. 어떤 모임은 20∼50대가 섞여 있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그룹도 있었다. 힘에 부쳤는데 사람들이 새로 모임을 꾸릴 수 없겠느냐고 꾸준히 묻더라. 친구들과 나의 특별한 경험을 담은 책이라 제목을 『소중한 경험』이라 붙였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기 분야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깊이 공부한 전문가들에게 미안해서 대중 강연은 안 한다.그냥 글만 쓴다”고 덧붙였다.

올해 창비에서 새 소설을 내지 않느냐고 묻자 작가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모 일간지에 연재 중인 칼럼을 마치면 3년간은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설뿐 아니라 칼럼도 쓸 생각이 없단다. 그는 “요즘 심리 쪽에 대한 관심이 머리에서 쫙 사라지고 있다. 사실 심리에세이를 쓰면서도 늘 ‘이게 마지막이야’라는 심정이긴 했다”며 “삶의 다음 단계로 옮겨가기 위한 발판으로 새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발을 먼저 옮겨간 다음에 소설을 써야겠더라”고 했다.

 

김형경 작가는 “모 일간지에 연재 중인 칼럼을 마치면 3년간은 글을 쓰지 않겠다. 소설뿐 아니라 칼럼도 쓸 생각이 없다. 삶의 다음 단계로 옮겨가기 위한 발판으로 새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발을 먼저 옮겨간 다음에 소설을 써야겠더라”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형경 작가는 “모 일간지에 연재 중인 칼럼을 마치면 3년간은 글을 쓰지 않겠다. 소설뿐 아니라 칼럼도 쓸 생각이 없다. 삶의 다음 단계로 옮겨가기 위한 발판으로 새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발을 먼저 옮겨간 다음에 소설을 써야겠더라”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3년간의 절필 선언 “칼럼도 안 쓰겠다”

새로운 관점이나 비전을 얻으려면 글을 쓰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체질을 바꿔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실은 2001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내기 전에도 3년간 글쓰기를 작파했다. 대신 정신분석을 받고 2년간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는 “이후 완전히 다른 글을 썼다. 심리와 정신분석이 접목된 글을 10년간 썼는데 이제 그 시기가 끝난 것 같다”고 말했다.

여행은 작가를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다. 세계 여행을 할 때도 집을 팔아 정리한 후 그 돈으로 다녔다. 작가는 “이런 거 저런 거 마련해서 한동안 살다 10년 있다 또 한 번 정리를 싹 할 것”이라며 “10년 주기로 끊임없이 한 번씩 뒤집어 엎어야지…”라며 웃었다.

그래선지 그에게선 바람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이 낳고, 남편과 다투는 세속의 느낌보다 여행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문득 그의 공간이 궁금해졌다. “우리 집은 굉장히 간소하다. 내가 지향하는 건 스님 방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그런 공간에 들어가면 편안하다.” 젊었을 때는 요사채 방 한 칸을 얻어 콘도처럼 사용했다니 작가가 좋아하는 공간이 대략 짐작이 갔다.

강릉 태생인 작가는 어려선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탐정을 꿈꿨다고 한다. 당연히 탐정이 되기란 어려웠고, 후순위 꿈인 작가로 우뚝 섰다. 학창시절에 책을 좋아한 작가는 “나도 책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78학번 동기 중에 쟁쟁한 문인들이 많다. 류시화나 이문재는 고교 때부터 ‘문학 스타’였다. 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기가 많이 죽었다고 한다. “덕분에 책도 많이 읽고 더 성실하게, 열심히 글을 쓰게 된 것 같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글만 읽으면 기승전결이 분명한 논리적인 사람일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허당 중에 이런 허당이 없다”고 했다. 갔던 길을 또 가도 헤매다 못 찾아서 몸이 고생한단다.

-유독 여성 독자가 많은 듯하다.

“내가 여성 입장에서 쓰니까…. 여성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의식하고 모색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약자다. 노예는 끊임없이 그 삶을 고민하고, 주인의 눈치를 본다. 그런데 노예 주인은 인생을 고민하지 않고, 노예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도 관심 없다. 이건 내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한 비유다. 사회적으로 이렇다 보니 자신이 왜 힘든지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다. 남자들은 여자의 입장을 모르니까 왜 저렇게 유난스레 구는지 의아해하고 비난한다. 약자로서 의존적으로 살아야 하고, 선택의 폭도 좁은 여자의 입장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렇다.”

-『남자를 위하여』도 흥미 있는 책이다. 남자들의 내밀하면서도 지질하고, 슬프면서도 아픈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썼다는 게 특이하다.

“오랫동안 남자 사회에서 살았으니까 어려울 것도 없었다. 결혼하면 가족 속에 들어가서 살 텐데 나는 계속 사회생활을 했으니까…. 우리 사회는 남자들이 만든 사회 아니냐. 남자 10명과 여자 1명이 있는 곳이니까.”

-요즘 남자들 참 많이 변했다.

“요리도 하고 육아도 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원하는 게 이런 거라는 메시지를 주고 남자들도 절박하게 여자가 필요하니까 여자가 원하는 걸 하게 된다. 젊은 친구들은 요리도 잘하고 스킨케어도 받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 여자 없이 사는 법을 많이 알고 있더라.

사실 남자들은 정말 여자를 필요로 한다. 할머니는 혼자 살아도 할아버지는 혼자 못 산다. 남자들이 모여 있다가 여자가 한 명만 들어와도 축제 분위기 아니냐. 언젠가 왜 남자들은 술자리에 여자를 불러내려고 애쓰냐고 아는 선생님께 물었더니 그러더라. 여자가 딱 한 명만 있어도 남자들은 행복해하고 분위기도 너무 좋아진다고. 오스트리아의 남자 전문 분석가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자가 있어야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자를 통해 남자가 감정을 접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작가는 “젊었을 때는 선배들이 많이 참아줬다”며 “문단도 30대 여성이 온순하고 상냥하길 원하더라. 그런데 나는 어디 가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사회의 기대치가 달라져서 마음이 편했다. 우리 사회가 나이 든 여자에게는 싹싹함을 덜 기대하기 때문이다.

-많은 칼럼에서 중년의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는 법을 알려줬는데.

“왜 나이를 안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이 먹는 게 어때서?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머리를 들이밀어선 곤란하다. 사랑을 구걸하는 것만 안 해도 충분히 자립적으로 살 수 있다. 중년이 되면 후배들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끊임없이 사랑받으려니 외로워지는 거다. 아기 때 사랑받기를 원하던 그 마음이 나이 들면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작가는 “세계 여행을 다닌 것도 중년의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라며 “30대 중반부터 중년이 시작된다. 나 역시 서른일곱 살 때 위기가 오더라”고 했다.

 

김형경 작가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건 가부장적인 우월성이다. 남자는 우월감만 버리면 여자와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형경 작가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건 가부장적인 우월성이다. 남자는 우월감만 버리면 여자와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자가 어른 돼야 남자와 화해한다

작가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엄마나 아빠가 잘 모르는데 부모가 가진 경쟁심이 자녀들을 향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들과 경쟁심을 느끼는 아빠, 딸과 경쟁심을 느끼는 엄마가 있다. 그러면 그게 자녀들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아이들이 자라지 않는다. 엄마가 무서워서. 왜냐하면 엄마에게 내 생살여탈권이 있는데 엄마가 나를 견제하면 ‘아, 나는 그럼 이제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라지 말아야겠다’ ‘내 좋은 자질을 발휘하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을 무의식에서 한다. 그런데 노년까지도 딸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엄마, 아들을 견제하고 화내는 아빠도 많다.”

-여자가 남자와 어울려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처럼 구는 유아기 생존법을 버려야 한다. 남자와 화해하면서 살려면 여자가 어른이 돼야 된다. 계속 징징거리면서 의존하고 무엇인가 받기를 바라면 절대로 화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해야 여자와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대한민국 남자들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건 가부장적인 우월성이다. 책도 나왔지 않느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런 거 모르죠? 오빠가 다 해줄게요’라고 한다.(웃음) 남자는 우월감만 버리면 여자와 잘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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