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맞은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

열네 살에 끌려가 8년간 끔찍한 ‘성노예’ 생활

“우리에게 아직 해방 오지 않아… 위안부 문제 해결이 우선”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로 담담히 성노예 생활을 증언했다. 여든아홉 살의 여성인권운동가는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몸으로 세계 전역을 돌며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로 담담히 성노예 생활을 증언했다. 여든아홉 살의 여성인권운동가는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몸으로 세계 전역을 돌며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경남 양산시 양산읍 시골 깡촌에서 살던 열네 살 소녀는 “품앗이를 나가야 하니 동생 둘을 돌보라”는 엄마의 한숨 섞인 말에 초등학교 4학년 공부를 작파했다. 일곱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에는 농사지을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 반장으로부터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한다. 안 가면 재산을 전부 몰수하고 외국으로 추방시켜 버리겠다”는 협박과 공갈을 받다 기어이 사지로 내몰렸다.

“힘도, 백도 없는 농민의 딸이니 덜컥 걸려버린 게지.”

7월 27일 오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마련한 쉼터인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만난 김복동(89) 할머니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위에 형들은 다 시집을 보냈거든…. 강제 모집한다니 술렁술렁했지…. 나이 찬 딸자식 가진 사람들은 빨리 시집보내야 싶은데 신랑감이 있어야지. 젊은 놈들 전부 징용으로 싹 데려갔으니. 머슴살이 하는 아버지 같은 총각, 징병에도 나이 많아 못 가거나 불구가 된 사람도 구하기가 힘들었지.”

중국 광저우를 거쳐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방콕, 싱가포르까지 열네 살부터 스물한 살까지 8년간 트럭에 실려 갔다 또 영문 모르고 끌려 다니는 생활이 반복됐다.

그 고난의 세월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김 할머니는 “몇 번을 죽을라고도 했는데 괜히 몸만 상하고…”라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광복은 싱가포르에서 맞았다. 미군 수용소에 있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나라는 두 동강 난 상태였다.

딸이 공장에서 돌아온 줄 알고 있던 엄마는 자꾸 시집가라고 성화였다. 결국 엄마에게 속얘기를 털어놓았다. “저승 가서 조상을 어떻게 보겠느냐더니 그게 화병이 되더라고.” 부산에 내려가 횟집을 차려 생계를 해결했다. 엄마가 화병으로 저세상에 간 후 홀로 남아 장사하던 그는 TV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은 신고를 해 달라’는 보도를 접하고 큰 용기를 냈다. “가정을 가지면 신고를 안 한다더라고. 내가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 신고한 게지.” 그렇게 김 할머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김 할머니는 나눔의집에 머물며 ‘역사의 증언자’로 나섰다.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도 참석해 세계 각지에서 온 여성들에게 전쟁에서 자행된 여성에 대한 국가의 끔찍한 폭력을 증언했다. “그때 우리나 운동하는 사람이나 참 울기도 많이 울었어.” 그런데 눈이 안 보이니 더 이상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부산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치료를 하고 있어요. 왼쪽 눈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른쪽은 핏줄이 서서 사람이 거꾸로 보여. 눈 안에 주사를 놓아서 사람 윤곽이 자세히 안 보여….”

2002년 윤미향 정대협 대표의 권유로 다시 서울에 올라온 김 할머니의 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구순을 앞둔 할머니가 어떻게 저런 에너지를 갖고 있을까 싶다. 그가 건넨 명함에 새겨진 ‘여성인권운동가’라는 말 그대로다. 지난 7월에는 미국으로 평화의 여정을 떠나 워싱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열고 조지워싱턴대 세미나, 국제앰네스티 면담, 미 국무부 면담 등을 통해 일본 아베 정권을 규탄하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미국 가서 오바마 대통령 욕 좀 했지. 아베하고 친하다면 친구가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이건 아니다, 먼저 해결 지을 건 해결지어라 해야지. 그래야 대국의 대통령이지.”

 

김복동 할머니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8년 동안 몇 번을 죽을라고도 했는데 괜히 몸만 상하고…”라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복동 할머니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8년 동안 몇 번을 죽을라고도 했는데 괜히 몸만 상하고…”라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는 슬픔과 분노가 절제된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세계 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미래 세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김 할머니는 올해 국경없는기자회와 프랑스 AFP통신이 펴낸 화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 100명』에 선정된 데 이어 서울시 여성상 대상도 받았다.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할 말이 많다. “아버지가 해결 못 지은 건 따님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해결지어야지. 이래 싸우고 있는데 일본하고 우리 일을 확실히 해결나기 전에 무슨 화합을 한다 카면 말이 안 돼.”

그는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일본정부에 배상을 받으면 전액을 우리와 똑같이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후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대협은 할머니들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비기금’을 창설해 매달 500달러씩 내전 피해를 입은 콩고의 한 전시 피해자 단체를 지원했다. 올해 그는 평생 모은 5000만원을 전시 성폭력 피해 자녀들의 장학금 지원을 위해 내놓았다.

“나비가 땅 밑에서 일 년 동안 고생고생 해서 벌레가 됐다가 하늘로 날아오르잖아. 우리가 고생했지만 지금은 나비처럼 날아올랐어요. 반대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 ‘나비가 돼 주겠습니까’ 하면 다 ‘예!’ 하지.”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김 할머니에게 광복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해방이 안 됐어요. 왜 우리를 ‘위안부’ 할매라 부르나요? 노예로 끌려 다니며 희생된 ‘성노예’인데….”

 

인터뷰 중 김복동 할머니가 모처럼 웃음 지은 것은 나비기금과 나비네트워크 이야기를 할 때였다. 할머니는 말했다. “나비가 땅 밑에서 일 년 동안 고생고생 해서 벌레가 됐다가 하늘로 날아오르잖아. 우리가 고생했지만 지금은 나비처럼 날아올랐어요.”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터뷰 중 김복동 할머니가 모처럼 웃음 지은 것은 나비기금과 나비네트워크 이야기를 할 때였다. 할머니는 말했다. “나비가 땅 밑에서 일 년 동안 고생고생 해서 벌레가 됐다가 하늘로 날아오르잖아. 우리가 고생했지만 지금은 나비처럼 날아올랐어요.”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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