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50년인 6월 22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와 시민단체가 굴욕적 한일협정 폐기와 일본 자위권 행사를 촉구하고 불법적 식민지배를 부정하는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한일수교 50년인 6월 22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와 시민단체가 굴욕적 한일협정 폐기와 일본 자위권 행사를 촉구하고 불법적 식민지배를 부정하는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서양문화가 심하게 언어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문화 전통에서 하나님은 ‘말씀’ ‘로고스’ ‘절대이성’과 같은 것과 동일시된다. 언어와 언어적 추론, 그것을 지배하는 논리에 극도로 민감한 서양의 전통이 철학을 만들고 과학을 만들었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 전통은 언어를 넘어서는 의미의 차원을 더 중하게 여겨 말 잘하는 일을 그다지 장려하지 않았다. 언어는 오히려 참된 뜻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성향은 약속과 계약, 거짓말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서양 전통에서 언어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과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 연유로 의미의 표준을 정하는 사전도 일찍 만들어졌다. 일찍이 철학자들이 꿈꾸었던 것은 한 단어에 하나의 튼실한 의미가 대응하는 질서였다. 정확하고 투명하면서 사물의 무게를 담고 있는 묵직한 언어. 플라톤은 문학을 거짓이라는 이유로 배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언어는 세계연관을 잃어버리고, 말이 말을 낳고 낳아 말만 넘쳐나는 세상이 됐다.

인간에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을 넘어선다. 언어로 생각하고 웃고 울면서 우리는 삶을 만들어 간다. 언어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언어적 폭행은 물리적 폭행 못지 않은 폐해를 낳는다. 언어적 관념론자들은 우리가 대면하는 세계 자체가 언어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곧바로 역사적 실재를 만들고 구성한다.

그렇기에 언어로 어떻게 사태를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세상을 어떻게 만드는가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집단 살상을 위해 가스실을 운영했던 독일 나치 군인들은 가스실에 가스를 주입하는 일을 ‘특별임무 수행’이라고 명명했다. 살인 행위에 따르는 죄의식을 없애고 오히려 맡은 바 임무 수행을 잘한다는 자부심까지 느낄 수 있도록 한 조처였다. 어떤 명명체계를 만들어 말의 질서와 말발을 세울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치가들이 말 짓기에 골몰하는 이유다.

우리는 ‘아베 일본’을 통해 말과 개념의 유희가 초래하는 말 질서의 교란과 혼탁함을 본다. 죄의식을 가리는 교묘하고 미끄러운 수사 안에서 나는 세계관의 전도, 나아가 세계의 전도를 꾀하는 일본을 본다. 일본군 ‘위안부’를 가해 주체를 생략한 채 슬쩍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하는 말이나 ‘강제노동’을 부정하는 말은 교묘하다.

이런 언어의 남용을 우리는 최근 대표적 여성 작가의 표절 논란 안에서도 겪었다. 책임의 소재를 따질 수 없도록 조작된 작가의 표현은 그 의도의 혼탁함 때문에 불쾌감을 준다. 정치가나 글쓰는 사람들이나 모두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말은 ‘목숨’까지 걸지는 않더라도 천금과도 같이 무거운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말의 엄정성을 벗어날 수 없다. 언어로 사는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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